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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공간들, 세계 메모리얼 파크&기념관

2024-10-08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공간들, 세계 메모리얼 파크&기념관

오늘날 건축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으로는 ‘메모리얼 파크’, ‘메모리얼 뮤지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메모리얼 건축은 현대 역사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과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을 조성하는 일인데요. 희생자를 기리는 건축을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두고, 참사로부터 친구나 가족을 잃은 이들뿐만 아니라 사회가 받은 상처, 시민들이 느낀 고통을 치유하며 더 나아가 그 사회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한편,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한 독립운동가의 말처럼 후손이 과거로부터 배움을 얻어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사회적 시스템을 조성하는 데에도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비석들로 표현한 참회의 역사,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유대인 메모리얼 파크&정보관

일상 속에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며, 위안과 치유의 공간이 되는 대표적인 메모리얼 파크를 손꼽는다면, 독일 베를린 홀로코스트 파크&정보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희생당한 유대인을 기리는 공간으로, 2005년 완성해 오늘날 베를린 시민들의 일상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크게 추모 공원과 홀로코스트 정보관이라는 두 공간으로 나뉘는데요. 제일 처음 마주하는 곳은 추모 공원입니다. 추모 공원은 19,073㎡의 넓은 부지에 2,711개의 높낮이가 다른 짙은 회색빛 콘크리트 사각 비석으로 가득합니다. 이 네모난 기둥은 발목 아래에 달하는 낮은 비석부터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4.7m의 높은 비석까지 높이가 제각기 다릅니다. 공원을 가득 메울 만큼 중요한 오브제이지만, 이곳을 디자인한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은 이 비석을 ‘콘크리트 기둥’이라는 보통 명사로 지칭합니다. 기둥의 디자인, 숫자 모두 홀로코스트의 역사의 상징적 의미도 담고 있지 않는데요. 대신 평균 8톤의 묵중한 비석의 무게, 공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높이가 올라가며 사람을 압도하는 콘크리트 기둥, 그리고 기울어진 땅이 시야를 어둡게 만들고, 방향 감각을 상실한 듯한 두려움을 조성합니다. 피터 아이젠만은 이런 연출을 통해 관람객에게 인간의 왜소함, 유대인 개개인이 경험했을 공포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한편, 지하 홀로코스트 정보관은 1845년부터 1933년까지 나치의 만행, 유대인의 기록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독일 정부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설계 중간에 제안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유대인들의 일기, 편지, 메모를 통해 당시 나치의 행동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유대인들의 평온한 삶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의 방’이라는 전시실에서는 홀로코스트로 사라지거나 죽은 유대인 희생자들의 이름과 간략한 생애를 낭독해 주는데요. 모든 희생자의 이름을 들으려면 무려 6년 7개월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21세기 가장 잔인했던 테러의 참상을 기록한,  미국 뉴욕 911 메모리얼 & 뮤지엄

2001년 9월 미국 뉴욕의 평온한 아침을 무너뜨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911테러입니다. 오사마 빈 라덴을 주축으로 한 테러 조직 알카에다가 4대의 비행기를 공중에서 납치한 뒤 미국의 국력과 세계화를 상징하던 쌍둥이빌딩 월드트레이드센터를 완전히 파괴시키며 수많은 뉴욕 시민이 희생되었는데요.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잃은 슬픔과 페허가 되어버린 뉴욕의 그 땅은 ‘그라운드제로(Ground Zero)’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추모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테러 발생 10년 만에 이 자리에 조성된 추모 공간은 ‘911 메모리얼&뮤지엄’인데요. 이곳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쌍둥이 빌딩의 자리에 만든 같은 사이즈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각형 풀(Pool)입니다. 분당 11,400리터의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듯 연출해 테러로 인해 흘린 유가족과 미국인의 눈물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물이 흐르는 이 추모비를 설계한 사람은 신예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입니다. 그는 ‘부재의 반추’라는 제목으로 풀의 중심부를 뚫고 물이 계속해 흐르는 형태로, 채움이 아닌 비움의 철학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추모비 주변 난간으로는 검은빛이 감도는 청동패널을 설치하고, 2,983명의 희생자 이름이 촘촘하게 음각으로 새겼습니다. 아라드는 추모 동판의 위치와 구성을 유족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유족의 의견에 따라 폭포 아래 지하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기려 했던 계획에서 다시 가족, 친구, 지인의 흔적을 일상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폭포 주변으로 패널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변경했습니다. 또한 이름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끼리 배치하기로 했는데요. 의미 있는 이웃을 연결하고 배치하는 작업에만 1년이 소요됐다고 합니다.

911 메모리얼 파크에는 전시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공원 내 작은 건물을 통해 연결되는데요. 메모리얼 공원 지하 전체에 걸쳐 테러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입구로 들어가는 길에는 ‘생존의 상징’인 테러 당시 완전히 파괴된 쌍둥이 빌딩에서 유일하게 깨지지 않은 유리창과 꼿꼿하게 서 있던 철기둥 등을 배치했습니다. 특히 철기둥은 ‘마지막 기둥’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으며, 복구 현장에서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해 사랑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박물관 입구부터 주 전시실까지는 폐허 속에서 발굴한 잔재, 구조 과정에서 희생된 소방관들이 탔던 반파된 소방차 등이, 주 전시실에서는 희생자의 사진과 사고 당시 소방관들의 음성 기록, 두 빌딩이 무너지는 과정을 시간대별로 기록한 자료들 등을 보여줌으로써 참담했던 당시 상황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참상을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관람객이 심적으로 견디기 힘들 때 언제든지 도중에 나갈 수 있도록 출구를 곳곳에 마련해둔 것도 이곳만의 특징입니다.

한편, 주전시실을 나오면 허드슨강을 막는 거대한 콘크리트 제방(벽)이 나오는데요. 테러 당시 붕괴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일부 금이 갔을 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벽의 붕괴가 있었더라면 맨해튼 남쪽 지역은 침수되고 지하철에 바닷물이 유입되며 뉴욕 내에 더 큰 희생이 발생했을 거라고 하는데요. 뉴욕시는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 미국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이 벽을 원형 그대로 보존할 수 있도록 보강공사만 진행했다고 합니다.

 

17세기 마녀재판으로 희생당한 91명을 추모하는 노르웨이 바르도 스타일네셋 기념관

노르웨이 바르도 지역에 세운 스타일네셋 기념관은 다른 기념관과 다르게 오랜 과거의 역사를 다시 수면 위로 올려 기록한 공간입니다. 마녀재판 중 가장 잔인했던 재판으로 알려진 17세기 바르도 마녀재판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이곳을 디자인한 사람은 스위스 건축가로 2009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페터 춤토르와 미국 설치 미술가인 루이스 부르주아입니다.

출처: wikipedia commons

스타일네셋 기념관은 두 개의 건축물로 되어 있는데, 페터 춤토르와 루이스 부르주아가 각각 하나씩을 맡아 설계하고 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페터 춤토리는 목제 프레임, 강철 와이어, 하얀 유리 섬유막을 이용해 누에고치처럼 긴 건축물을 설계했는데요. 내부는 폭이 100미터 남짓한 복도를 조성해 양쪽 벽에 희생당한 91명의 이야기와 함께 91개의 창문과 불을 연출했습니다. 환하고 밝았던 건물 밖과 다르게 안쪽으로 들어오면 갑자기 좁고 어두운 분위기로 반전되는데요. 상당히 어둡고, 좁고 긴 공간에 공포감을 느껴지기도 합니다.

출처: wikipedia commons

91개 창문에 새겨지는 91명 희생자의 이야기를 살피고 그 공간을 빠져나오면 바로 두 번째 공간으로 연결되는데요. 큐브 파빌리온으로, 스틸과 검은 유리로 만들었습니다. 중앙에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인 <The Dammed, The Possessed and The Beloved>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강철 의자와 그 위에서 365일 타는 불꽃을 통해 마녀사냥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한편, 그 주변으로 7개의 타원형 거울이 불꽃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요. 그 당시 마녀사냥의 희생자를 지켜보며 침묵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의 상처를 기억하며 대비하는 고베항 지진 메모리얼파크 & 사람과 방재 미래센터

일본 고베 개항 120주년을 기념해 만든 해안공안인 메리켄 파크 안에도 메모리얼 파크가 존재하는데요. 바로 고베 지역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피해를 기억하고 자연재해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고베 항 지진 메모리얼 파크’입니다. 이곳에서는 1995년 1월, 진도 7의 강진이 발생했던 한신 아와이 대지진의 피해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 지진으로 고가도로는 물결처럼 출렁이다 무너졌으며, 철길은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등 많은 사회 기간시설이 파괴되었습니다. 또, 63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산업이 마비되는 등 지역사회는 굉장히 혼란했다고 전해집니다.

출처: wikipedia commons

메모리얼 파크는 지진 당시 파괴된 항구의 부두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면 기울어진 가로등, 솟구쳐오른 땅, 부서진 콘크리트 구조물, 침수된 잔해까지 지진의 흔적 중 일부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복구된 고베의 모습, 메리칸파크의 시설과 대조되며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체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진 피해를 입었던 시민들의 증언, 기록, 사진을 담은 패널과 전시물과 정기적으로 방영되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제공합니다.

고베항 지진을 기억하는 곳은 고베 지역 내에 또 있는데요. 바로 메모리얼 파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사람과 방재 미래센터’라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16만 점에 달하는 고베 대지진과 관련된 도서, 비디오, 물건, 사진 자료를 보유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방문객은 4층부터 한 층씩 내려오며 관람하게 되는데요. 엘리베이터로 4층에 도착하면 맨 처음 4면을 통해 고베 대지진 당시 도시가 무너지는 파괴적인 현장을 대형 영상과 음향으로 7분간 접하게 됩니다. 방문객은 공간 한 가운데 서 있는데, 마치 지진의 참상 한 가운데 놓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당시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순간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3층에서는 스토리텔러가 직접 설명하는 지진재해 체험담 역시 인상적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방재 미래센터는 자연재해로부터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해주는 동시에 방재와 감재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줍니다. 한편, 당시 기록들은 재해 경감을 위한 자료로도 활용하며, 재해대책 전문직원을 육성하는 등 단순한 기록이나 참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넘어 재해를 대비하는 연구기관으로서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때 죽음을 기리는 추모공간은 엄숙하고 신성한 곳이면서도 도심에 두는 걸 기피하던 장소였는데요. 오늘날 현대 메모리얼파크는 지역의 삶과 문화 속에서 비극과 희생을 기억하고 치유합니다. 단순히 역사적 흔적을 보전하는 것도, 유가족들의 사적인 치유공간이 아닌 지역 주민들이 일상으로 머물며 그 흔적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관광객들이 꼭 방문하는 공적인 공간으로서 도시의 한 요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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