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 위주로 설계된 도시는 종종 삭막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보다는 차량 중심으로 짜여진 도로 환경도 어느새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죠. 이런 환경에서 도시의 삶은 자동차의 속도와 범위에 맞춰질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 전 세계 도시에서 이런 익숙하고 단조로운 환경에 색채와 디자인을 입혀 사람 중심의, 활기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들의 목적은 단지 경관을 ‘예쁘게’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 보행자의 안전과 편의를 높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에 더 오래 머물게 하며, 도시의 정체성까지 담아내고 있죠. 이러한 변화 덕분에 도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활기로 가득한 공공 공간으로 변신했습니다. 더 나아가 교통사고 감소와 지역 공동체 강화 등의 효과를 이끌어내며 도시가 사람 중심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술과 디자인을 통해 안전하고 활기찬 도시 환경을 조성해 사람들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혁신적이고 생생한 움직임들을 만나봅니다.
출처: 블룸버그 재단
아스팔트 아트 이니셔티브 프로젝트는 ‘예술이 거리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블룸버그 재단은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도로에 예술을 접목한 연구를 진행했는데요. 바로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된 회색 도시와 도로 공간에 색상과 창의성을 불어넣어 사람 중심의 거리로 새로운 재해석하고자 한 것이죠. 그들은 2020년부터 뉴욕, 시애틀, 포틀랜드 등 미국 41개 도시와 유럽 2개 시범 도시를 대상으로 예술을 접목한 도시 미관 개선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6,000여명의 주민들과 189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18개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료됐고, 지역 주민들이 직접 기획과 제작에 참여함으로써 커뮤니티에 대한 소속감과 애착 역시 크게 높아졌죠.
이 프로젝트가 시행된 첫 번째 도시는 미시간 주의 시그노(Saginaw)였습니다. 침체된 도심 교차로에 변화를 상징하는 나비 모티브의 대형 그림을 그려 교통안전과 도시 회복을 동시에 꾀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500명이 넘는 시민과 23명의 지역 예술가들이 참여해 약 381평의 도로를 색으로 채웠습니다. 선명한 패턴과 색상은 운전자들의 속도 감소와 보행자 인식 향상에 기여하며, 아스팔트 아트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아스팔트 아트는 도로(교차로 및 횡단보도), 보행자 공간(광장, 보도 등), 다리 지하도 등 다양한 도시 공간에 시각적 요소를 적용해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최소 2년 이상 진행된 전국 17개 아스팔트 아트 현장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 따르면, 상해로 이어지는 충돌사고는 37% 줄었고,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의 충돌사고는 무려 50%나 감소했습니다. 다양한 색감들을 사용해 공간의 가시성을 높이고, 운전자들로 하여금 속도를 줄이고 주의를 기울이게끔 장려한 결과죠. 흥미로운 점은 운전자가 보행자에게 양보하는 비율 또한 27% 증가했다는 겁니다. 회색 아스팔트에 색깔을 입혔을 뿐인데, 도시는 더욱 안전해졌고, 사람들은 더욱 친절해졌죠. 단순한 색상과 디자인만으로도 도시의 안전과 시민들의 행동이 바뀐다는 사실을 증명해냈습니다. 이러한 성과로 2022년부터 2023년 사이 미국 26개 도시가 추가로 선정되었고, 현재까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도시는 100여 개를 넘어섰습니다.
예술을 통해 공동체를 연결하고, 공공 안전을 높이는 것은 물론,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아스팔트 아트 이니셔티브는 도시의 기능과 분위기를 동시에 변화시키며 예술이 도시를 바꾸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는 성공적인 공공예술 실험의 대표 사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 블룸버그 재단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설립한 자선단체로, 도시의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도시 혁신 및 공공 공간 개선을 중심으로 교육,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스팔트 아트 이니셔티브는 그 일환으로 추진된 프로젝트로, 소규모 예산으로도 큰 변화를 이끌어내며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영국 런던에서는 디자인 그룹 THB가 2015년 브릭스턴 지역을 시작으로 ‘컬러풀 크로싱(Colorful Crossing)’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도시 공간을 더욱 활기차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기존의 단조로운 횡단보도를 다채로운 색상과 독창적 패턴으로 탈바꿈시키는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였죠. THB는 이 프로젝트로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요. 그들은 이 프로젝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당시 영국에서 2016년 16세 미만 보행자와 관련된 교통사고가 15,000건 이상 발생했다는 통계를 바탕으로, 어린이 보호구역과 학교 주변 보행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별도의 프로젝트인 ‘세이프 스텝 포 스쿨(Safe Steps for School)’을 기획하게 됩니다.
출처: THB세이프 스텝 포 스쿨은 2018년 2월 크로이던(Croydon) 지역의 Crescent Primary School에 첫 번째 횡단보도를 설치하며 본격 시작되었는데요. 미끄럼 방지 기능이 있고, 환경 친화적인 밝은 색상의 횡단보도에 발자국 모양을 더해 어린이들이 안전하고 재미있게 도로를 건널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두 프로젝트는 단순히 미적 변화뿐 아니라 교통안전과 도시 미관 개선, 보행자 사고 감소 등의 다양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며 주민들과 학교 관계자들의 높은 만족도를 얻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도 어린이들의 보행안전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활발히 이어지고 있는데요. 파리, 리옹, 툴루즈 등에서 학교 앞 도로에 착시효과를 주는 3D 횡단보도를 설치해 운전자들이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이도록 유도하고 있죠. 특히 파리에서는 어린이들의 등하굣길 보행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2026년까지 300여 개 거리를 보행자 전용 구역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하며 ‘학교 거리(School Streets)’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기존의 자동차 중심 공간을 녹지와 놀이 요소가 어우러진 아이 친화적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도보 통학을 장려하며 주민들이 어울릴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확장하겠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죠. 두 프로젝트는 모두 학교로 가는 길이 통행 공간일 뿐만 아니라, 교육과 예술, 공공 안전이 어우러진 실천의 장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보행자의 안전을 높이기 위한 디자인을 통해 공공 공간의 기능과 감성, 안전을 동시에 고려하며, 공공의 안전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 THB는 런던 기반 디자인 회사로, 도시 공공 공간에 예술적이고 안전한 디자인을 접목해 교통 안전과 도시 미관 개선을 목표로 합니다. ‘컬러풀 크로싱’ 같은 프로젝트로 보행자 안전 강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건축 스튜디오 ‘100아키텍츠’는 1km 길이의 오래된 다리를 과감한 색상 조합과 패턴을 통해 생동감 넘치는 랜드마크로 만들었습니다. 하이 루프(High Loop) 프로젝트는 쑤저우강의 남과 북을 잇는 다리인 ‘푸지 보행자교(Fuji Pedestrian Bridge)’를 사용자와 기능에 따라 새롭게 재배치한 리노베이션 설계안입니다. 푸지 보행자교는 1997년 보행자를 위해 지어진 다리로, 2009년에는 상하이 세계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소형 차량과 자전거, 스쿠터도 다닐 수 있도록 바뀌었습니다. 10여년 후인 2020년 100아키텍츠는 이 다리를 독특한 공공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는데요. 바로 기존 교량 구조를 손대지 않고, 오직 그 위에 페인트로만 동선을 정리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설계 아이디어였죠.
사진 출처: 100아키텍츠
100아키텍츠의 건축가들은 이 회색빛 아스팔트를 단순히 화려한 색으로 덧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능에 따라 색상을 달리 사용해 이 다리만의 특징을 부여했습니다. 구불구불한 마젠타 길로는 보행자들이, 직선 차선의 라임 컬러는 소형 차량이 이동할 수 있고, 노란 원형 테이블에서는 보행자들이 도시 경관을 즐기며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의도적으로 공간을 비워두고 벼룩시장이나 야시장 등의 행사를 열 수 있도록 설계했죠. 다양한 속도와 리듬이 공존하는 이 길은 이곳만의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도심 속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사람들에게 휴식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바르셀로나는 그래픽 디자인 회사 아라우나 스튜디오(Arauna Studio)와 협업해 도로 공간에 새로운 디자인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도로를 단순한 차량이 다니는 길이 아닌 보행자가 중심이 되는 공공공간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였죠.
이 실험은 최근 도시 디자인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텍티컬 어바니즘(저비용, 소규모의 시범적 디자인 투입을 통해 도시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는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바로 ‘공간의 기능을 시각적으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라우나 스튜디오는 바르셀로나 도시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적인 보도블럭 타일인 파노트(Panot)에서 영감을 얻어, 도로 위에 다양한 패턴과 색상을 입히는 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17세기부터 사용된 이 타일 요소들을 기하학 패턴으로 재해석한 뒤, 이를 다시 알파벳 형태로 변환해 도로에 적용했습니다.
출처: arauna studio
이러한 변화는 도로가 차량을 위한 길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공간임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었죠. 사람들은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 단순히 차를 피해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공간의 주체임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도로 위에 거리 이름을 새기는 전통 방식을 차용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도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공공공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디자인 전략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바르셀로나와 아라우나 스튜디오는 이 프로젝트를 오픈소스 툴 형태로 만들어 배포해 시민들이 무료로 자신의 공간에 적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요. 덕분에 별도 예산이나 대규모 인프라 공사 없이 도시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국내외로 큰 주목을 받으며 2023년 Grand Laus 디자인 어워드에서 그래픽 부문 최고상을 수상했고, 뉴욕 ADC Awards(Art Directors Club)에서도 공간 및 환경 그래픽 부문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차가 오가던 아스팔트를 사람 중심의 안전한 공간으로 재해석한 이 시도는 디자인을 통해 도시가 직면한 기후 위기와 교통 문제, 공공공간 부족 등의 현실적인 문제에 실질적인 해결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출처: camillewalala 홈페이지
뉴 런던 패뷸러스는 새롭고 멋진 런던이라는 뜻으로, 2020년 초 런던을 중심으로 등장한 공공 도시 디자인 운동입니다. 기존의 절제된 미니멀리즘에서 벗어나 거리 곳곳에 다채로운 색채와 반복적인 패턴을 활용해 활기를 불어넣자는 움직임이었죠.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았던 시기, 도시의 개성과 다양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애덤 나다니엘 퍼맨, 잉카 일로리, 카미유 왈랄라 등의 디자이너들은 공공미술, 횡단보도 디자인, 벽화작업을 활발하게 펼치며 런던의 거리를 새롭게 해석해 왔는데요. 그중에서도 카미유 왈랄라가 2020년 런던 서부 화이트시티에서 진행한 레 쥬모(Les Jumeaux, 쌍둥이)는 뉴 런던 패뷸러스의 대표적인 작업으로 손꼽힙니다.
화이트시티는 1908년 런던 올림픽 개최지이자, BBC 방송국이 위치한 지역으로 역사적 의미와 도시적 맥락이 깊은 공간입니다. 왈랄라는 우드레인(Wood Lane)과 사우스아프리카 로드(South Africa Road)라는 두 개의 횡단보도와 인근 오피스빌딩 외벽에 총 7개 벽화를 제작했죠. 그녀는 이 지역의 단순한 블록 구조와 직선 형태의 건물들로 이루어진 도시 환경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명확한 선, 반복되는 기하학적 패턴, 대담한 원색을 활용해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레 쥬모’라는 작품명은 두 횡단보도의 구성이 쌍둥이처럼 닮아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녀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활력을 주는 색채를 두 장소에 동시에 색을 입혀서, 공간끼리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다”며 작품의 의미를 전했습니다. 도시의 분위기를 환기시킨 이 프로젝트는 이 거리를 걷는 수천 명의 시민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공공 예술이 도시 공간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인상적인 예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나라들은 대담한 색감과 창의적인 디자인을 통해 보행 공간을 새롭게 꾸미며 점차 도시를 ‘사람 중심의 공간’으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은 환경과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예술과 일상이 어우러진 활기찬 공공공간을 만들어냈죠.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새로운 공공공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도시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