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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표셀렉트

지구에 새겨진 인류의 지문, 에드워드 버틴스키 <버틴스키: 추출/ 추상>

2026-03-03

지구에 새겨진 인류의 지문, 에드워드 버틴스키 <버틴스키: 추출/ 추상>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자원은 어디서 올까요? 그 자원을 얻는 과정에서 자연은 어떻게 변하고, 또 어떻게 가공될까요?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버틴스키: 추출/ 추상>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거대한 사진 예술로 보여주는 특별한 전시였습니다. 한-캐나다 상호 문화교류의 해를 기념해 3월 2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런던 사치갤러리와 베니스 M9 현대미술관을 거쳐 아시아 최초로 개최되어 더욱 의미가 깊은데요. 전 세계가 인정한 사진작가 에드워드 버틴스키가 포착한, 압도적인 산업 풍경의 이면을 만나봅니다.

 

블루칼라의 도시에서 탄생한 사진 예술가

1955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세인트 캐서린스(St. Catharines). 제너럴 모터스(GM)가 도시 전체를 먹여 살리던 전형적인 블루칼라 산업도시에서 우크라이나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버틴스키에게, 거대한 선박과 공장 구조물은 경외감과 호기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카메라와 처음 만난 것은 11살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구해온 중고 암실 장비와 트라이엑스 필름 두 롤이 세계적인 거장의 시작이었죠. 이후 우크라이나 커뮤니티에서 행사와 초상 사진을 찍으며 기본기를 다진 그의 세계관은 20대 시절 비로소 만개합니다. 1976년, ‘인간의 흔적(Evidence of Man)’이라는 과제를 받고 우연히 길을 잃어 들어선 펜실베이니아주 프랙빌. 그곳에서 석탄 채굴로 완전히 파헤쳐진 초현실적인 풍경을 마주한 그는 ‘산업 현장의 기록’을 소명으로 삼게 됩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캐나다 현대사진박물관이 기획해 주요 미술관을 순회한 전시를 통해 버틴스키는 본격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요. 특히 1996년에 작업한 ‘니켈 광미’ 시리즈는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의 예술성은 2005년 제1회 TED상 공동 수상, 2016년 캐나다 총독 시각 및 미디어 예술상 등 다양한 수상 이력으로도 입증되었습니다. 현재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등 전 세계 80여 개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6인치의 마법

그의 작품은 아주 정교하고 압도적인 대형 사진으로 유명합니다. 초기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그는 극도의 고해상도를 자랑하는 8X10인치 대형 필름 카메라를 고집했습니다. 무겁고 부피가 큰 장비지만, 토양의 질감과 구조물의 미세한 표면까지 샅샅이 담아내기 위한 선택이었죠.

이러한 집념은 ‘6인치 법칙’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철학을 탄생시켰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웅장하고 추상적인 회화 같지만, 작품에 6인치(약 15cm) 앞까지 다가서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섬세한 디테일과 새로운 장면이 펼쳐지는 체험을 선사합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주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촬영되는데요. 초기에는 자연지형, 크레인 등 다양한 방법으로 높은 뷰 포인트를 확보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헬리콥터나 비행기를 이용한 항공 촬영으로 시야를 더 넓혔습니다. 그는 ‘헬리콥터에서 핸드헬드로 촬영하는 것이 매우 도전적이었고,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았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2011년부터는 기술의 발전으로 탄생한 드론에 디지털 카메라를 장착해 촬영하며 인간이 만든 산업 시스템의 구조와 패턴을 더욱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결정적 순간’을 이야기한 사진 작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과 다르게 버틴스키는 ‘숙고된 순간’을 제시하는데요. 카르티에 브레송이 순간적 포착이라면, 버틴스키는 산업의 느린 축적에 초점을 맞출 뿐만 아니라 작업 역시 패턴과 디테일 모두를 담기 위해 깊은 사색과 숙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추출과 추상이 그려낸 지구의 자화상

이번 전시는 버틴스키의 40년 예술 여정을 총망라합니다. 도입부를 장식하는 ‘추출’과 ‘추상’ 섹션은 지구의 자원을 뽑아내는 순간과 그로 인해 변형된 자연의 기묘한 패턴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제조업과 기반시설’, ‘농업’, ‘폐기물’ 섹션을 통해 우리는 산업이 변화시킨 자연의 민낯을 직면하게 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평소 보지 못한 산업의 내부와 인류가 지구에 남긴 흔적들을 사진을 통해 따라가 볼 수 있습니다.

 

섹션별 전시 작품 

섹션1. 추상

광미 연못 #2, 웨슬턴 다이아몬드 광산, 킴벌리, 노던케이프주, 남아프리카공화국, 2018년

다이아몬드 채굴 후 남은 폐기물(킴벌라이트)이 물과 섞여 슬러리 형태로 흐르는 모습입니다. 킴벌라이트의 명칭은 이도시의 명칭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푸른빛과 흙빛이 뒤엉켜 마치 한 폭의 추상화 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보석을 얻기 위해 땅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보여줍니다.

건조지 농업 #21, 모네그로스 카운티, 아라곤주, 스페인, 2010년

아르 브뤼(Art Brut) 운동을 창시한 예술가 장 뒤뷔페의 그림처럼 기묘한 패턴은 지속 가능한 농업방식을 지향하는 스페인의 농업지대입니다. 건기와 우기 순환에 따라 작물을 재배합니다. 날로 심해지는 고온 현상으로 기후변화와 가뭄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섹션2. 추상

우랄칼리 칼륨 광산 #1, 베레즈니키, 러시아, 2017년

길이만 3,000km에 달하는 우랄칼리 칼륨 광산의 내부를 촬영한 작품입니다. 분당 7~8톤의 광석을 깎아내는 연삭휠 120대가 지나간 벽면에는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장미꽃 모양의 곡선이 남아있습니다.

소카르 유전 #3, 바쿠, 아제르바이잔, 2006년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버틴스키는 글로벌 석유 시장을 해부한 ‘오일 시리즈’에 집중했습니다. 수출의 절대 다수를 석유에 의존하는 아제르바이잔의 소카르 유전의 풍경으로, 짙은 원유가 수면을 뒤덮고 그 위로 차가운 산업 구조물이 데칼코마니처럼 비칩니다.

 

섹션3. 제조업과 기반시설

생산#10a #10b, 찬쿤 공장, 샤먼시, 중국, 2005

푸소형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중국 샤먼의 찬쿤 공장입니다. 끝없이 이어진 공간 속에서 묵묵히 부품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행렬을 아득한 초점과 장시간 노출로 담아냈습니다.

 

섹션4. 농업 (Agriculture)

온실, 알메리아 반도, 스페인, 2010

매년 수백만 톤의 작물을 쏟아내는 세계 최대의 온실 밀집 구역입니다.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린 기적의 현장이지만, 그 이면엔 거대한 화학물질과 지하수 고갈, 끝없는 비닐 폐기물이라는 묵직한 부채가 쌓여가고 있습니다.

 

섹션5. 폐기물

니켈 광미 #34 & #35, 서드베리, 온타리오주, 캐나다, 1996

버틴스키의 최고 대표작입니다. 산화철과 반응한 광미가 마치 펄펄 끓는 용암처럼 강렬한 주황빛을 띱니다. 웅장한 대자연의 일부 같지만, 실은 니켈 채굴이 남긴 폭 1m 남짓의 오염된 개울이라는 사실이 반전입니다.

 

이외에도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작업에서 실제로 사용한 카메라와 각종 도구, 그리고 그의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아카이빙되어 있어 수많은 걸작이 탄생하는 과정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버틴스키 사진은 산업적 현상이 남긴 흔적들이 추상적 예술처럼 보이는 장면을 포착해 인류가 지구에 어떤 형태와 패턴을 남기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일 우리가 소비하고 누리는 자원이 어디서 오는지, 그 과정에서 지형과 도시, 농경지가 어떻게 설계되고 변형되는지, 그리고 산업 발전의 이면에는 어떤 인프라와 시스템, 이슈들이 있는지 한번쯤 되짚어보는 계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