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건축은 사회적 실천이며, 건축가는 사회적 중재자라고 하죠. 그만큼 건축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나 환경에 대해 어느 분야보다 깊이 이해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숙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건축물은 때때로 많은 사회적 변화들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는데요. 최근 건축의 중심에 ‘인간’과 ‘공동체’라는 공공의 가치를 두고, 건축을 통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사회적 건축가’ 혹은 ‘인본주의적 건축가’들이 건축계에서 크게 주목 받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건축의 변방으로 여겨지던 라틴 아메리카의 한 건축가로부터 시작된 사회적 건축의 시대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인데요. 이들은 자신의 주요 포트폴리오 대부분을 지역 사회에서 공동체의 기반을 다지거나, 도시의 주거 및 환경 문제 개선을 위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거나, 지역의 환경적 특색과 조건을 그대로 반영한 건축 프로젝트들로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건축의 사회성과 공공성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 및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의 건축이 나아갈 시대적 방향성까지 제시하고 있는 현대 건축의 거장들을 소개합니다.
칠레 출신의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는 현대 건축이 사회적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건축을 통해 어떻게 인간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 건축가입니다. 1994년 도시와 주거 디자인에 대한 자신만의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건축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2001년 사회적 건축 그룹 ‘엘리멘탈(Elemental)’을 공동 설립하면서 그가 늘 꿈꾸던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건축 디자인’을 목표로 한 본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게 됩니다.
그의 확고한 건축 철학으로는 사용자(거주자)와 건축가가 함께 협력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참여형 디자인과,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확장이 가능한 건축, 그리고 환경과 에너지 문제를 고려한 지속가능한 건축 등을 꼽을 수 있는데요. 이러한 신념은 기능성과 실용성을 강화하되, 디자인은 모던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진행된 여러 공공주택 프로젝트에서 더욱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는데요. 지금의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를 있게 한 ‘킨타 몬로이 사회주택(Quinta Monroy Housing)’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칠레 이키게((Iquique) 지역의 빈민가에 건설된 킨타 몬로이의 핵심은 ‘반만 완성된 주택((Half Housing)’또는 ‘증분 주택(Incremental Housing)’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사회주택들이 비효율적인 구조와 무질서한 증축 등으로 많은 문제를 겪었던 점에 착안해 완공 초기에는 주방과 욕실, 계단 등이 포함된 기본 구조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추후 사용자의 여건과 필요에 따라 언제든 확장 및 변경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방식입니다. 결과적으로 저소득층에게 일종의 동기 부여가 된 부분이기도 한데요. 이러한 그의 선택은 부족한 주거 예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공공주택이 거주자의 경제적 자립과 주거 환경 개선을 동시에 지원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이후에도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와 그가 소속된 엘리멘탈은 멕시코와 페루, 콜럼비아 등의 여러 국가에서 킨타 몬로이와 유사한 모델을 적용해 다수의 공공주택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2010년에는 대지진과 쓰나미가 강타한 칠레의 도시재건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지속가능성이 대폭 강화된 ‘빌라 베르데 사회주택(Villa Verde Housing)’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주택 위기와 도시 환경 개선을 위해 오랜 시간 헌신해왔고, 인본주의적인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예술성과 혁신성을 놓치지 않는 원숙함을 보여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는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가 직면한 사회 문제들을 건축의 영역에서 해소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칠레에 알레한드로 아라베나가 있다면, 세계 최대 규모의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에는 발크리쉬나 도시(Balkrishna Doshi)가 있습니다. 도시계획가이자 건축학교를 운영한 교육자로도 유명한 그는 인도의 문화와 자연, 정체성 등을 존중하며 이를 건축 설계에 반영해온 인물로, 집을 통해 거주자의 삶의 질까지 높인 건축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건축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인본주의 건축의 대가인 르 코르뷔지에 밑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스승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인도의 전통 건축 양식과 역사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건축 스타일을 구축했습니다.
특히, 20대 시절이던 1950년대부터 2023년 사망하기 전까지 100개가 넘는 저비용 주택 모델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건축을 통해 국가와 국민에게 기여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다수의 공공 시설 및 교육문화 공간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중 1989년 인도의 중부도시 인도르(Indore)의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해 설계한 아란야 서민공동 주택단지(Aranya Community Housing)는 8만 명 이상의 저소득층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절대 빈곤율이 높은 인도에 꼭 필요한 주거 솔루션이었습니다.
발크리쉬나 도시의 대표작이기도 한 아란야 주택단지 내 6,500세대가 넘는 집들은 저비용 고품질의 현대적인 건축 방식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안마당과 복도를 통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로 설계되었는데요. 이는 그가 늘 강조해온 공동체적 삶을 반영한 커뮤니티 중심의 설계 방식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이 지역의 공동체를 견고히 하는 긍정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평생의 작품 활동 목표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것”이라 말했던 거장의 건축 유산들은 지금도 인도 곳곳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오랜 시간 혈연이 아닌 공동체 기반의 ‘지역사회권’을 주장하며 건축 공간을 통해 거주자들이 이웃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는 일에 기여해온 건축 거장이 있습니다. 바로 사회와 인간을 이어주는 건축을 추구하는 야마모토 리켄(Yamamoto Riken)인데요. 그의 이러한 건축 철학은 형태적으로 절제되고 단정한 설계 디자인에서뿐만 아니라 전용 공간을 줄이거나 전용과 공용의 경계를 느슨하게 허무는 방식으로 커뮤니티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해안도시 구마모토(Kumamoto)에 건설된 그의 첫 공공주택 프로젝트, 호타쿠보 주택(Hotakubo Housing)입니다. 110채의 주거 공간 사이에 개방감은 물론, 주민들 간의 소통을 이끌어내기 위해 중앙에 넓은 공유 마당을 두었고, 모든 주택은 마당을 중심으로 둘러싸듯 배치되어 있습니다. 특히, 마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택과 주택 사이를 통과해야만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요. 이는 호타쿠보 주민들이 공적 영역의 공간을 이용할 때 동선의 공유를 통해 서로 만나고,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고 하겠습니다.
개인의 사회적 고립을 우려하는 마음, 편리함과 효율 대신 공동체 회복을 강조하는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의 진심이 담긴 작품은 우리나라에도 존재합니다. 2010년 LH공사가 진행한 판교 하우징인데요. 3~4층 규모로 구성된 100가구의 공동주택단지로, 10~12가구를 하나의 그룹 개념으로 설정하고 2층에 위치한 ‘커먼 덱(Common Deck)’을 통해 주민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한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현관을 둘러싼 모든 벽이 통유리로 되어있어 완공 초기에는 사생활 보호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판교 하우징의 실제 거주자들은 야마모토 리켄이 처음 의도한대로 이웃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다정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함께 모여 사는 사람들이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는 야마모토 리켄의 사회적, 건축적 신념에 기반한 행보는 공동체의 개념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더욱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건물을 절대 부수지 않는다((Never demolish)’는 건축 원칙을 고수하며 사회적 건축의 새로운 대표주자로 떠오른 안 라카통(Anne Lacaton)과 장 필리프 바살(Jean-Philippe Vassal)은 40년 가까이 프랑스와 유럽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시종일관 인류와 환경을 존중하는 건축을 추구해 왔습니다. 기존 건축물과 형태를 유지하고 활용하는 건축가들은 많지만 이미 존재하는 건축물을 최대한 존중하고 긍정하는 태도를 ‘낙관주의(Optimism)’라 명명하며, 이러한 건축적 신념을 모든 작업에 일괄적으로 적용하고 지켜온 이는 드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 대신 꼭 필요한 부분을 개선하고, 최소한의 변형 및 개입만으로 건물에 새로운 기능과 역할을 부여하는 일에만 집중하자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지속가능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이후 더욱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1960년대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 지어진 530가구 규모의 낡은 아파트(Cité du Grand Parc)를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기존 건물은 그대로 남겨둔 채 콘크리트 파사드만 제거해 내부를 더 크게 확장하고, 발코니 공간을 넓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도시 조망권과 온실 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설계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방식은 사회적 주거 시설의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예산 절감이라는 경제적 효과까지 고려한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또한,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주민들은 이주의 번거로움 없이 건물 안쪽에서 그대로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도 놀라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 라카통과 장 필리프 바살은 공간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그 안으로 들여오는 생태학적 작업에 능숙한 건축가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1993년 ‘라타피 하우스(Latapie House)’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요. 건물 뒤편에 접이식 폴리카보네이트 패널을 설치해 공간 전체에 자연광이 비추도록 하는 한편, 거실부터 주방에 이르는 실내 공용 공간을 확장해 온실 정원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이는 사계절 내내 에너지를 보존하는 동시에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데요. 이렇게 만들어진 온실 정원은 단열이나 환기에도 매우 용이합니다. 이처럼 가장 경제적인 재료를 통해 공간의 사용성을 극대화하고, 기후 적응 능력과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 역시 안 라카통과 장 필리프 바살이 평생을 걸쳐 실천하고 있는 건축의 사회적 책임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