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끔직한 인명피해와 더불어 또 다른 그늘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있던 문화적, 역사적 흔적들이 잔혹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박물관, 탑과 같은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유네스코는 지난 6월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파괴된 문화 유적지의 현황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6월까지 총 66개의 종교 유적, 12개의 박물관, 28개의 역사적인 건축물, 18개의 문화시설, 15개의 기념비 등과 7개의 도서관이 그 이름을 올렸고, 4개월이 더 지난 지금 그 수는 더 많아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전쟁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고, 삶의 터전을 부수고 파괴합니다. 그리고 나서 부서져 없어진 건축물들은 복원을 통해 역사를 그대로 품거나, 때로는 과거의 흔적을 기념비 삼아 아주 새로운 건물로 세워지기도 합니다. 《건축은 어떻게 전쟁을 기억하는가》는 그 파괴와 창조의 역사를 엮어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콜로세움, 에펠탑, 개선문 등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만한 세계적인 랜드마크가 겪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고,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합니다. 전쟁에서 필수적인 성이나 요새 같은 건축물은 적군에게서 아군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만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도 파괴당하고, 때로는 전부 부서져 없어지기도 합니다. 한편 전쟁은 건축물을 부수지만 새로 만들기도 합니다.인류는 건축물을 통해서 승전의 영광을 쌓거나, 패전의 아픔과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립니다. 전쟁을 일으킨 인간은 사라지지만 건축물은 남아서 전쟁사를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에펠탑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1889년 파리 센강 서쪽 마르스 광장에 세워졌습니다. 1909년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에펠탑을 사랑한 파리시민들의 반대로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죠.
에펠탑은 제 1차, 2차 세계대전의 증언자입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은 에펠탑의 무선송신기를 활용해 독일군의 무선통신을 방해하면서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는 더 극적인 상황에 놓입니다. 독일군은 1940년 파리를 점령해 에펠탑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이 파리로 진격해오자, 파리의 주요 건축물을 폭파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사령관 콜티츠에게 에펠탑을 비롯해 루브르박물관, 노트르담대성당, 콩코르드광장 등 파리의 주요 건물을 폭파하고 파리 시가를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콜티츠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콜티츠의 말을 들은 그의 아내는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훗날 콜티츠는 “나는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며 명령을 거부한 이유를 밝힌다. 히틀러가 콜티츠에게 9번이나 전화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콜티츠의 명령 불복종으로 에펠탑을 비롯해 파리의 문화유산은 단 하나도 파괴되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의 결정으로 파리에 있는 수많은 건축물, 그리고 사람들이 불태워질뻔 했고, 또 단 한 사람의 결정으로 파리의 있는 수많은 문화재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극소수의 사람에 의해 전쟁이 시작되고, 그 피해가 계속되고, 또 끝이 납니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받는 건 무고한 건축물과 사람들이죠.
콜티츠는 종전 이후 전범재판을 받아 영국과 미국 등에서 복역하다가,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공로로 수감된 지 2년만인 1947년 가석방됩니다. 또, 파리를 무사히 지켜준 데 따른 파리 시민들의 감사장과 명예 시민증까지 받았습니다.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사람이 말이죠. 적이었지만 위험을 무릅쓴 그의 선택으로 파리를 구하게 된 건 분명하니까요. 그와 파리, 그리고 에펠탑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독일 동부 작센의 주도인 드레스덴은 ‘엘베강의 피렌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건축물들이 존재하고 있었죠. 그 도시가 온통 폐허가 되는데는 단 이틀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은 수백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드레스덴을 융단폭격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20세기 드레스덴은 독일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이제 공장과 주요 산업체 127개가 있는 통신과 제조업의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제 2차 세계대전기간 중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된다. (중략) 이 때문에 드레스덴의 90%가 파괴되고 무고한 민간인 약 2만 5,000명이 사망한다. 또 집이 15만채 이상 파괴되고 츠빙거 궁전, 작센 의사당 등도 완파되었다. 처참하게 무너진 드레스덴의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성모교회는 이틀간 벌어진 연합군의 폭격을 견뎌냈지만, 공습 셋째 날 소이탄이 일으킨 섭씨 1,000도가 넘는 불길을 버티지 못했다. 결국 교회는 2월 15일 폭발하듯 주저앉았다. (중략) 독일의 최종 항복을 14주 남겨 놓고 실시한 이 공습은 히틀러의 런던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진 작전으로, 과연 이러한 조치가 타당했는지를 두고 제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후 독일은 항복했고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습니다. 1949년엔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죠. 드레스덴은 동독 영토가 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교회 터를 밀어버리고 주차장으로 쓰려고 했지만, 시민들의 반대로 이를 철회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연합군의 참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45년간 방치합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나서야 드레스덴의 성모교회는 복원을 시작했습니다. 초기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옛모습을 기억하는 시민들이 제공한 자료를 모아 교회의 원형을 되살리고, 시민들이 잔해에서 수습한 벽돌 3,800개를 새 돌과 함께 쌓아 올렸습니다. 드레스덴 성모교회의 외벽 군데 군데 보이는 검은 돌들이 그날의 흔적들입니다. 드레스덴을 터전으로 평범하게 살았던, 그리고 그날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시민들이 도시 재건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복원 과정에서 가능한 한 원래의 모습대로 되살리려는 노력도 눈물겨웠다. 다행히 건물 설계도는 남아있었지만 청동으로 만든 교회 출입문의 설계도는 없어 문의 원래 문양을 알 수 없었다. 드레스덴시는 시민들에게 성모교회의 사진이나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시민들은 자신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사진첩을 뒤졌다. 마침내 누군가가 성모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문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찾아냈고, 드레스덴시는 이 사진을 받아 똑같이 출입문을 복원했다.
완전히 부서진 건물을 새로 짓는 일이었기 때문에 재건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총 1억 8,000만 유로(한화로 약 2,300억원)가 소요된 비용은 미국과 영국 등 20개국을 비롯해 개인과 기업이 보낸 기부금으로 충당했고, 나머지는 드레스덴시와 작센 자유연방 및 연방정부가 분담했습니다. 영국에서는 화해의 움직임으로 드레스덴 트러스트가 설립돼 600만 파운드(한화로 약 93억 5,000만원)을 모금하면서 재건에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파괴가 반복됩니다. 고작 소수에게서 시작된 전쟁이 다수에게 너무나도 큰 피해를 남깁니다. 건축물은 그 파괴의 피해자이자 증언자로 계속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증언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평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