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수백만 명의 많은 인파가 단풍으로 물든 산을 찾아 운치를 즐깁니다. 산림청은 올해 첫 단풍이 평년보다 늦을 것으로 전망했는데요. ‘2025 산림 단풍 예측 지도’에 따르면 지역별 차이는 있으나 단풍 절정 시기는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에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설악산을 시작으로 속리산, 가야산, 내장산 순으로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출처: 산림청
기후변화로 인한 계절의 변화는 단풍 뿐 아니라 으레 가을하면 떠오르던 전어, 사과, 배, 꽃게, 김장 김치 등으로 채워지던 가을 밥상 풍경까지 완전히 바꿔 놓고 있습니다. 기후가 점차 따뜻해지면 단풍이 사라지는 것 뿐 아니라, 가을이라는 계절이 소멸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론까지 나옵니다.
단풍의 절정 시기는 매년 늦춰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작년에는 단풍 지도를 보고 산을 찾았는데도 단풍을 보지 못했다는 관광객들이 많이 속출했는데요. 전국에서 가장 빨리 단풍을 볼 수 있는 설악산도 관측 이래 가장 늦은 시기에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유래 없는 가을 폭염이 단풍 개화에 영향을 끼치며 가을의 풍경을 바꾼 겁니다.
산림청 분석 결과에 의하면 단풍 절정 시기(각 수종의 단풍이 50% 이상 물들었을 때를 기준)가 최근 10년 대비 약 4~5.2일 늦어지고 있으며, 단풍나뮤류는 0.43일, 참나무류는 0.52일, 은행나무는 0.50일씩 늦어지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유진남, 설악산 봉정암 추경
기온이 1도 오를 때마다 단풍 시작일이 약 4일 늦춰지는 만큼, ‘지각 단풍’ 현상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식물은 일 최저기온이 5℃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기온이 낮을수록 단풍 시기도 빨라지죠. 가을이 시작되면서 일조량이 줄어들고 수분이 부족해진 나무가 광합성 작용을 중단하면서 엽록소가 파괴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단풍 색깔이 나타나게 됩니다. 노란 색소인 카로티노이드가 드러나면 노란단풍이, 안토시아닌이 생성되면 붉은색이, 타닌성 물질이 축적되면 갈색을 띠는 거죠. 색을 입는 일은 나무들의 월동준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무가 낮 동안 충분히 햇빛을 받고, 기온이 서서히 낮아지면서 일교차가 커질 때 아름답고 선명한 단풍의 색이 나오는데요. 최근에는 단풍의 빛깔 또한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기온 상승과 미세먼지, 강수량 증가 등의 이상 기후로 일조량이 감소함에 따라 당분 생산 및 저장량에 문제가 생긴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당분이 색소와 결합하지 않고 식물의 다른 부분으로 영양분으로 공급된 것이죠. 한마디로 지구온난화로 나무가 정상적으로 계절의 변화를 준비할 시간이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매년 단풍 시기가 늦어지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관측되고 있습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북반구 온대 지역을 중심으로 단풍의 시기와, 색 변화 등의 양상이 보이고 있는 것이죠. 특히 북미와 유럽의 온대 기후권은 기후 변화에 따른 계절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단풍 관광이 지역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 많기 때문에 단풍과 기후변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생태학 전문 저널인 Landscape Ecology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 북동부 메인 주의 대표적인 단풍 명소인 아카디아 국립공원(Acadia National Park)은 지난 70여 년간 단풍 절정 시기가 점차 늦어지고 있으며, 2060년경에는 단풍이 10월 말에서 11월 초로 더 늦춰질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생태학과 임학 분야의 권위자인 미국 버몬트대 빌 키튼 교수는 지난해 PBS 뉴스에서 “기후 극한 상황이 나무에 스트레스를 주고, 색상을 띠는 화학 물질의 생산을 방해하면서 가을 단풍의 강도를 약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 또한 최근 단풍 색이 예전보다 덜 선명하고 늦게 나타난다는 관측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2024년 10월 일본 기상협회(JWA)는 일본 전역에서 가을 단풍 절정 시기가 평년보다 늦어지고 있다고 전했는데요. 단풍 시기 변화와 색상의 약화가 앞으로의 관광 일정 조정과, 관광객 만족도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죠. 또한 식물 생태학자인 코이데 다이 연구팀이 단풍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최근 10년간 일본 단풍의 밝기와 변화 속도 모두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는 고산지대를 중심으로 분석되었지만, 낮은 표고 지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이미 진행 중이며, 앞으로는 기후변화에 더 민감한 지역부터 순차적으로 단풍 약화 현상이 확산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기후변화가 현재 추세대로 지속될 경우, 일부 지역에서는 단풍 색의 밝기가 약 15% 이상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도 제시됐죠.
이처럼 더운 날씨 때문에 나무들이 정상적으로 계절의 변화를 인식하고 반응하지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요. 전문가들은 나무들이 높은 기온과 가뭄으로 색이 바래고, 빨리 시들수록 기후 변화의 악순환도 더 빨라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단풍이 늦게 드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작물의 생장 주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사과나 복숭아 같은 과수들은 적절한 추위를 겪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못하거나 품질이 낮아질 수 있고, 이른 개화로 봄철 한파에 피해를 입으면 수확량이 줄어들어 물가 또한 상승하게 됩니다.
단풍만이 아니라 사과, 배, 배추, 전어 등 가을의 풍경을 채워온 식물과 음식도 기후 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과가 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농촌진흥청은 ‘사과 재배지 변동 예측지도’를 통해 주요 과일 재배 지역 전망을 내놓았는데요.
<사과 재배지 변동 예측 지도>
출처: 농촌진흥청
사과는 과거 30년의 기후 조건과 비교하면 앞으로 지속해서 재배 적지와 재배 가능지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2070년대에는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사실상 한국에서 사과는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에 농촌진흥청에서는 기후변화로 착색이 어려워지는 점을 고려해 15년 전부터 개발에 착수했고, 2022년부터 기후변화 대응품종인 노란사과로 불리는 ‘골든볼’을 개발해 농가에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더워진 날씨로 인해 사과뿐 아니라 시원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배추 재배도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산악 지역에서 재배되는 배추는 25℃를 넘지 않아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데, 기후변화로 인해 배추 품질 저하는 물론, 고지대 배추 재배 면적 또한 20년 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면서 작황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김장을 담그는 시기도 늦춰지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대표 음식인 김치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기도 합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충격은 바다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과와 배추 외에 가을철 별미로 불리는 전어 또한 수온 상승으로 어획량(3만 톤 → 1만 톤)이 줄었습니다. 9월까지 이어진 폭염으로 국내 연안의 고수온(평년보다 수온이 2도 이상 오를 때 발령) 현상이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9월의 해수 평균 온도는 10년 평균치보다 3.5℃ 높은 27℃로, 전어가 서식할 수 있는 최대 온도(15℃~21℃)보다 약 6℃나 높았습니다. 바다 생물에게 수온 1도 상승은 육지에서 5도 이상 오른 것과 같은 영향을 주죠.
수협중앙회 수산경제연구원의 ‘수산경제리포트’ 등에 따르면 작년 10월 2주차(7~12일) 노량진수산시장 기준 전어 1㎏ 평균 경매 가격은 1만 7,600원으로 집계됐는데요. 전년 같은 기간 6,200원과 비교하면 무려 183.9%나 급등한 수치입니다. 해양수산부의 고수온 폐사현황을 보면 잦아진 고수온과 장기화로 인해 양식어종이 대량 폐사하며, 수산자원마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후 온난화가 계속됨에 따라 우리가 익숙하게 느껴왔던 선선한 바람과 서늘한 공기로 대표되던 가을의 모습은 점점 달라지고 있습니다.
기상청은 작년 9월 우리나라 계절별 길이를 재조정한다는 발표를 했는데요. 최근 10년 동안 여름의 평균 일수가 98일에서 127일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 계절의 길이와 맞추기 위한 조정 작업으로, 우리나라 근대 기상 관측 이후 11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남부 지방의 경우 한반도의 기온이 계속 높아진다면 상대적으로 기온 상승의 영향을 덜 받는 일부 고산 지대를 제외하고 단풍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단풍이 드는 온대성 낙엽수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동남아 등에서 볼 수 있는 아열대성 사철나무가 대신하게 되는 겁니다. 앞으로 기후 변화가 계속된다면, 우리가 알고 있던 ‘가을 다움’은 더 이상 같은 모습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겁니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특징이 옛말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출처: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구본상, 덕수궁의 가을
안타깝게도 지각 단풍 현상은 계절 풍경만의 변화는 아닙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온 시간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이자 경고인 것이죠. 식물에 이어 어류, 곤충, 조류, 포유류까지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면 종 다양성 감소는 물론 생태계 먹이사슬의 균형이 흔들리게 되고, 계절의 질서가 무너지면 인간 역시 시간 감각이나 생체 리듬에 혼란을 겪으며, 결국 생태계 전체가 불안정해질 수 있습니다. 점점 달라지고 있는 계절의 모습은 기후 변화가 우리 삶과 생태계에 미칠 영향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큼 다가온 기후 위기 앞에, 우리는 마주한 변화의 의미를 무겁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