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로 동아시아 해안 도시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조약항으로 지정된 도시에서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충돌하며 새로운 건축 양식이 만들어졌습니다. 조계지의 서양식 건축과 전통 가옥이 공존하기도 하지만, 이내 두 양식이 서로를 흡수하고 변주하기도 했는데요. 이를 통해 중국에서는 중서합벽과 아모이 데코가, 일본에서는 제국풍 양식이, 한국에서는 일본을 경유한 서양 절충주의 양식의 건축물이 등장했습니다. 동아시아의 역사적 유산이자 근대 건축의 시초가 된 개항 도시의 건축물을 만나봅니다.
1842년, 제1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나라는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하며 광저우·샤먼·푸저우·닝보·상하이 5개 항을 개방했습니다. 특히, 상하이는 세계 각국의 조계지가 되어 서구 열강의 자본과 기술이 유입되는 통로가 되었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극동에서 가장 번창한 경제 및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죠. 이 과정에서 중국과 서양의 미학이 뒤섞인 새로운 건축양식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석고문(石庫門)’ 주택입니다. 19세기 후반 상하이에서 등장한 석고문은 전통 사합원 평면을 기반으로 하되, 2~3층의 입체적 구조에 서양식 장식 요소를 가미한 독특한 연립주택입니다. 석재 문틀과 두꺼운 목판 문, 좁은 골목을 따라 이어지는 회색 벽돌과 유럽풍 문양은 상하이의 근대적 풍경을 상징합니다. 현재 장원 지역에서는 석고문을 보존하고 리모델링하여 플래그십 스토어와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키고 있습니다.
1934년 건축가 라슬로 후덱이 설계한 파크호텔은 서구 건축 양식을 그대로 수용해 만든, ‘동방의 진주’ ‘동방의 파리’라 불리던 상하이의 위상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중국 최고의 고층 아르데코 건축이자 1983년까지 상하이 최고층 마천루(84m)로 군림했습니다. 수직으로 뻗은 기하학적 외관과 다크 브라운 벽돌, 블랙·화이트·골드의 내부 대비는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라슬로 후텍은 프랑스 전함 ‘노르망디’를 기념해 범선 형태로 우캉멘션을 설계하기도 했는데요. 곡선형 외관과 프렌치 발코니가 인상적으로, 독특한 외관 덕분에 오늘날 포트 스팟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편, 남부 푸젠성의 항구도시 샤먼은 또 다른 의미에서 건축의 융합을 보여줍니다. 개항 이후 구랑위 섬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계지에는 각국의 건축 양식이 혼재되어 ‘만국 건축 박람회’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는데요. 전통 푸젠식 건축, 서양 신고전주의, 동남아 콜로니얼 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형성된 독특한 풍경 속에서 ‘아모이 데코’라는 새로운 양식이 탄생했습니다. 구랑쉬는 201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아모이 데코의 건축물로는 팔괘루가 있는데요.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원형 돔 건물로 전통 팔각 지붕과 서양 석조 기법이 결합해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1859년 일본이 서구 열강에 도시를 개항하면서, 요코하마와 하코다테는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꽆치웠습니다. 요코하마는 일본인 마을과 외국인 거류지가 분리된 형태로 발전했는데요. 일본인 마을은 전통 거리 구획을 따랐지만, 외국인 거류지는 서구 도시계획과 직선 도로가 질서정연하게 조성된 서양 도시 형태를 보였습니다.
이 시기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바로 더킹, 더퀸, 더잭의 ‘요코하마 삼탑’입니다.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던 시기에 세워진 공공 기관건물로,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퀸, 요코하마 세관, 출처: https://www.yokohamajapan.com/kr/things-to-do/detail.php?bbid=64
‘더킹’으로 불리는 가나가와현청은 1928년 완공된 건물로, 아르데코 양식에 일본식 지붕 형태를 더한 제국풍의 양식을 보여줍니다. 서양 신고전주의 건축 위에 일본 전통미를 융합한 절충미가 돋보이죠. 1934년 완공된 요코하마 세관 ‘더퀸’은 둥근 돔이 이슬람 사원의 모스크를 연상시키며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1917년 개항 5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더잭’ 요코하마 개항기념관은 벽돌과 화강암을 혼합한 다쓰노식 프리클래식 양식으로, 약 36m 높이의 시계탑이 웅장하고, 요코하마 항을 주제로 한 스테인드글라스가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출처: 일본어 위키백과의 京浜にけ,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8217497
일본 최북단의 개항도시 하코다테는 전통 일본식 방어 구조와 서양식 요새 기술이 결합된 고료카쿠 요새로 유명합니다. 네덜란드의 부르탄제 요새를 모델로 1857년부터 건설되었죠. 현재는 벚꽃 명소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편, 하코다테의 서양식 건축물도 주목할 만한데요. 구 하코다테구 공회당은 좌우 대칭 구조의 콜로니얼 양식으로, 블루 그레이와 노란색의 강렬한 대비가 특징인 일본 근대 목조건축의 걸작입니다. 또한 구 영국 영사관은 빅토리아 시대의 양식으로, 일본 전통 기와와 서양식 굴뚝이 공존하는 독특한 외관을 자랑합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을 기점으로 1883년 개항한 인천(제물포)과 이어 근대 항만 도시로 성장한 군산은,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양 건축이 자리 잡으며 새로운 근대 경관을 빚어냈습니다. 본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인천은 부산·원산에 이어 세 번째 개항한 항으로 일본·청·미·영 등 열강이 들어온 국제도시로 변모했습니다.

인천개항박물관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김지호
대표적으로 오늘날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운영되는 구 일본 제18은행은 화강암·벽돌·타일을 모르타르로 치장해 석조처럼 보이도록 만든 절충주의 양식으로 손꼽힙니다. 석재 장식의 정면 포치와 내부 적벽돌 마감, 일본식 기와를 얹은 지붕이 어우러져 개항장의 이국적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구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현 인천개항박물관)은 중앙 돔을 갖춘 후기 르네상스 계열의 석조 건축으로, 안정적인 비례감과 아치 현관이 금융 건축물의 위용을 드러냅니다. 또 근대 건축물로는 답동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본래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가 1937년 개축에서 붉은 벽돌과 연속 아치를 강조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변모했는데요. 정면으로 보이는 3개 탑의 구성은 20세기 초 국내 가톨릭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군산 근대건축관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송재근
서해의 또 다른 개항도시 군산에도 근대 건축물들이 존재합니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산 붉은 벽돌을 들여와 지은 옛 군산세관이 대표적입니다. 붉은 벽돌과 화강암을 결구한 외벽, 내부 목구조, 고딕적 지붕 선형과 로마네스크식 개구부가 섞인 파사드는 일본이 수용하고 해석한 서양 고전주의를 담고 있습니다. 군산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한 1920년대 은행 건축의 전형으로, 2층 규모임에도 4층에 달하는 높은 층고와 과장된 지붕 마감으로 위계를 강조했습니다.
서구 문물의 유입은 동아시아 개항도시에 새로운 건축 언어를 탄생시켰습니다. 중서합벽, 제국풍 양식, 절충 건축.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모두 동서양이 충돌하고 융합한 결과물인데요. 개항의 아픈 역사이자 오늘날 현대 건축을 있게 해준 이 건축물들은 역사적 산물로 그 자리에 남아 시대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