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의 경험은 우리에게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성과 한정된 공간에서도 디지털을 통해 교류하고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동시에, 내가 사는 바로 주변의 자연과 일상 인프라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는데요. 그런 니즈에 맞춘 새로운 도시의 방향성, ‘15분 도시’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15분 도시’는 2020년 7월 서울, 런던, 파리, 뉴욕 등 주요 40개 도시가 참여하는 ‘C40 기후리더십그룹’의 도시 정책으로 채택되며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개념으로 등장했습니다. 15분 도시는 도시의 모든 사람이 집에서 도보, 자전거를 이용해 일상적인 니즈와 인프라에 접근할 수 있는 모델을 뜻합니다.
15분 도시는 코로나19로 인해 주목받았는데요. 많은 전문가들이 대도시에 밀집해 생활하는 사회의 형태가 바이러스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뉴욕, 런던, 상하이, 파리 등 세계 다수 도시는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며 기회가 풍부해지자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일터와 집터가 분리되는 직주분리의 설계가 이뤄지고, 이에 따라 교통도 자연스럽게 발달했습니다. 대규모의 인구 및 업무 밀집 여건은 바이러스 확산을 높였고, 대도시를 ‘감염병 확산의 경로들이 중첩되어 있는 곳’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코로나19로 갇혀 지내던 시민들은 도심 속 공원에 관심을 갖고 이용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자연을 통한 힐링, 정서적 안정을 주고 직주근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더는 기존 도시의 형태가 우리의 안전과 일상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15분 도시가 주목 받게 된 것입니다.
15분 도시의 대표적인 곳은 프랑스 파리이며, 호주 멜버른, 미국 포틀랜드와 디스트로이트, 스페인 바르셀로나도 동일한 혹은 비슷한 개념의 도시를 조성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산이 15분 도시를, 서울은 보행일상권의 개념을 도입해 미래 도시의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15분 도시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은 프랑스 소르본대 카를로스 모레노 교수인데요. 그가 말하는 15분 도시의 핵심 목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일상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도보 또는 자전거로 15분 내 접근할 수 있게 컴팩트한 도시공간을 조성하는 것, 둘째, 도시 내 공원 등 녹지공간을 확보하고 도보와 자전거를 교통 수단으로 해 탄소배출을 줄이고 친환경 녹색도시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거주자가 필요로 하는 일상생활의 필수 기능인 거주, 생활, 일자리, 건강, 교육, 여가 등을 15분, 혹은 30분 내에서 보행, 자전거, 차량 등의 교통수단을 이용해 접근할 수 있는 생활권을 설정합니다.
모레노 교수는 꼭 ‘15분’이라는 시간이나, ‘자전거’ 등 특정 이동수단을 기준으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지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서비스 근접성, 탄소 중립, 삶의 질을 높이는 환경, 이웃과의 사회적 연결성 등을 고려해 각자 도시가 처한 맥락에 맞춰 사람과 자연환경이 중심이 될 수 있게 구성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즉, 15분 도시는 주거지와 가까운 거리의 인프라를 경제 활동, 문화, 여가지로 사용하고 건물을 다양하게 활용함으로써 공간의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또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출퇴근, 폐기물 처리 등을 위해 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일을 최소화해 탄소발자국을 줄여 갑니다.
15분 도시의 대표적인 곳, 바로 파리인데요. 파리의 15분 도시는 4가지 핵심 원칙이 있습니다. 첫 번째, 모든 시민이 식료품, 신선한 음식, 건강 관련 상품 및 서비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일하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다양한 가족 구성에 맞게 거주 가능한 여러 유형, 면적의 주택을 제공합니다. 세 번째는 모든 시민이 깨끗한 공기를 즐길 수 있는 충분한 녹지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원격 근무자를 위한 집 근처 소규모 사무실, 코워킹 스페이스, 접대 시설 등을 두고자 합니다.
사실 15분의 거리에 있는 공간은 굉장히 한정적입니다. 그 면적 안에 필요 시설을 모두 세우는 게 꽤나 어려운 일인데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파리의 도시 전문가들은 ‘하나 장소를 여러 기능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면 학교와 대학은 주말과 공휴일에 문을 열어 놀이터나 휴식 공간으로 제공하고, 일부 주차 공간은 주말 식당의 야외 테이블석 공간이나 자전거 차고로 활용하며, 영화관을 회의 장소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중과 주말, 낮과 밤 등을 기준으로 갖춰진 건축 환경에서 최대한 가치를 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파리는 15분 도시 개념을 미니메스 지구(Minimes Barracks)에 적용했습니다. 기존 건물을 공영주택단지, 보육원, 식당, 사무실 등 복합용도로 재건축해 일상생활을 위한 기초시설을 배치했으며, 주차장은 공원으로 리모델링했습니다. 또한 5분 거리에 있는 바스티유 광장과 리퍼블리크 광장 등을 보행자 중심의 공간으로 재정비했으며, 코로나19 이후 교통혼잡 완화, 사회적 거리두기, 탄소 중립 등을 위해 설치한 자전거 전용도로도 영구화하기로 했습니다.
바르셀로나에는 ‘슈퍼블록’이라는 도시의 구성이 있습니다. 슈퍼블록은 바르셀로나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만사나(Manzana) 9개를 하나로 묶은 공간을 의미합니다.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400m의 작은 마을로 5,000~6,000명이 생활합니다. 슈퍼블록 안쪽 차로엔 자동차나 오토바이 접근이 어렵습니다. 주로 주민들이 소유한 차나 응급차 등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차들만 통행이 가능하고, 블록 밖의 제한 속도가 50km인 것과 달리 이곳은 시속 10km로 거주자들의 보행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슈퍼블록은 15분 도시가 주목받기 전인 2016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도시화로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인데요. 2014년 바르셀로나는 유럽연합이 제시한 ‘공기의 질’ 목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공기 오염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시에서 슈퍼블록을 추진하며 공해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실제로 비토리아-가스티즈(Vitoria-Gasteiz) 지역의 이산화탄소 방출이 42%, 미세먼지 오염은 38% 감소했으며, 소음 공해도도 66.5d BA(decibels acoustic)에서 61dBA로 낮아졌습니다. 이후 바르셀로나 시는 러시아워와 혼잡도가 높아졌다는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을 계속해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편, 바르셀로나의 운송수단 중 자동차, 오토바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불과하지만, 슈퍼블록 이전엔 운송수단이 전체 도로의 60%를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슈퍼블록은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고, 보행자와 자전거, 대중교통 이용자 중심의 도시로 변화하게 해주었는데요. 45%에 불과하던 보행공간 비율이 74%로 증가했으며, 휴식, 여가, 스트리트 마켓 등 시민 간의 교류 공간이 증가하며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의 결속력이 더 높아지는 효과를 거뒀다고 합니다.
왕복 20분 내에서 일상을 보내는 멜버른 동네
멜버른은 다른 도시와 달리 ‘20분’을 도시의 원칙으로 세웠는데요. 호주 빅토리아 주 정부는 멜버른 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차량 의존도를 낮추고 보행자 중심으로 공간을 재편성하는 ‘플랜 멜버른 2017-2050 종합계획’에서 전략으로 ‘20분 동네’의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20분 동네는 자동차 없이 왕복 20분 이내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설, 서비스에 접근 가능한 환경 조성을 목표로 합니다. 이 정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동 수단은 ‘보행’입니다. 도보로 쉽고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지역별 거점으로 ‘활동센터(activity Center)’를 설치하고 지방정부에서 계획하고 관리하는 사회서비스와 기반시설을 활동센터 주변에 두고 서로 연계되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면 인근에 생활에 필요한 베이커리, 슈퍼마켓, 신문가판대 등과 같은 소매점이 입점하고, 카페, 레스토랑 등의 여가시설도 생겨납니다. 활동센터를 중심으로 지속 가능하고 평등하며 접근성이 좋은 동네가 형성되는 것이죠.
특히 크로이던 사우스(Croydon South) 지역에서 진행한 지역사회와 파트너십을 맺는 통합형 근린 계획은 지역 상점의 활성화를 유도해 이들이 동네를 위한 여러 서비스를 지속해서 제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또한 20분 동네는 물리적 측면의 접근성뿐만 아니라 시민이 부담가능한 임대료로 오랫동안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주택, 시민들의 보행 편의성, 고용 기회, 문화 예술 등 질적 측면도 함께 고려합니다. 오픈 스페이스를 이용해 여러 문화 경험 기회를 제공한다거나, 보행자 안전을 위한 각종 정책, 자전거 도로망 구축, 일자리 등과 같이 도시 유지와 발전을 위한 여러 요소들을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2040 서울도시기본계획>의 7대 목표 중 하나로 ‘보행일상권 조성’을 언급했는데요. 최근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보행일상권은 코로나19 팬데믹, 디지털 대전환 등 사회적 여건 변화에 따라 주거지가 일상생활의 중심 공간으로 바뀌며 달라진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도시공간 개념입니다. 30분 이내 보행권 안에 일자리, 여가문화, 수변녹지, 상업시설, 대중교통거점 등 모든 기능을 아우르는 자립적인 생활권 만들기를 목표로 합니다.
보행일상권은 교통약자를 포함해 누구나 평등하게 이동하고 생활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통합형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기능을 하는 한편,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중립도시로 나아가는 첫걸음으로도 보고 있는데요. 특히 서울시의 계획은 지역 내 발생한 폐기물을 자체적으로 처리해 외부 의존도를 낮추고 가정부터 생활권 단위의 시설까지 공간단위로 자원처리시설을 확충하고 복합자원순환시설을 마련해 자원의 재활용을 높여갈 예정이라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한 20여개의 크고 작은 공원 녹지와 3km 하천, 1km2 이상의 수변공간 등 자연환경도 보행일상권 안에 포함하고 있어 쾌적한 주거, 일상 환경을 조성해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N분 도시’의 개념을 토대로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인간과 자연을 중심에 둔 이 모델이 미래 도시의 풍경을 어떻게 바꿀지 더욱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