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상영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은 영화사에서 상징적인 순간으로 기록됩니다. 실제로 관객들이 스크린 속 열차가 다가오는 장면에 놀라 자리에서 뛰쳐나왔다는 일화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는 스크린 속에 등장한 기차가 사람들의 감각과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했음을 보여줍니다.
산업혁명의 아이콘이자 낭만적 여행의 상징이었던 기차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닫힌 공간 속 다양한 인간 군상을 드러내는 무대이자 성장과 만남, 모험과 판타지의 출발점으로 그려졌고, 현재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애니메이션에서 기차는 현실과 상상을 이어주는 작은 세계이자 매개체로 자주 등장하며, 관객에게 동심과 낭만, 그리고 감동을 선사합니다.
2004년 개봉한 <폴라 익스프레스>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을 달리는 신비로운 열차를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1985년 출간된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동화를 원작으로, 영화 <백 투 더 퓨처>로 유명한 로버트 저메스키가 감독을 맡았습니다.
산타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는 어린 소년이 우연히 폴라 익스프레스라는 기차에 올라타 산타가 산다는 북극으로 여행을 가며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요. 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배경은 열차 안으로, 전체 스토리 역시 ‘기차가 북극으로 가는 일’과 ‘주인공이 산타의 존재를 다시 믿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기차는 승객들을 북극으로 안내하는 이동 수단이자 산타에 대한 어린이의 동심을 일깨우는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됩니다. 끝까지 ‘순수한 믿음’과 ‘환상’이 중요한 이유를 전하며 감동을 줍니다.
<폴라 익스프레스>는 배우들의 몸에 미세한 인식기를 붙이고 연기해 섬세한 표정과 움직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애니메이션화하는 ‘모션 캡처 기술’을 활용해 개봉 시 더욱 주목 받았었는데요. 또, 배우 톰행크스가 기관장, 소년, 소년의 아버지, 떠돌이, 스크루지, 산타클로스까지 다역의 연기 목소리를 소화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은하철도 999>, 이 애니메이션에 영감을 불어넣은 원작 애니메이션이 있는데요. <은하철도의 밤>입니다.
<은하철도의 밤>은 1927년 출간된 미야자와 겐지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늘 놀림을 받는 소년 조반니가 축제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밤하늘을 바라보다 우연히 단짝인 캄파넬라와 함께 은하철도라는 기차에 올라타며 밤하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조반니는 기차 안에서 여러 승객을 만나고 사연을 들으면서 삶과 죽음, 우정, 고독, 행복 등 의미를 찾아갑니다. 또한 은하철도를 통해 조반니는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기차는 단순히 여행 이동수단을 넘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잇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은하철도는 미야자와 겐지의 고향인 이와테현 하나마키에 있던 하나마키 전철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요. 길쭉한 차체가 특징적인 이 전철은 하모니카 전차라는 별칭도 있다고 합니다.
<인피니티 트레인>은 미국 카툰 네트워크(Cartoon Network)에서 제작한 시리즈로, 끝없이 이어지는 기차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인물들의 심리적 성장을 그린 옴니버스식 애니메이션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심리적으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거나 자기 삶에 닥친 문제를 마주하기 힘든 사람에게 기차가 나타나는데요. 각 객차는 승객들이 가진 상처와 두려움이 반영된 환상적인 세계를 투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즌의 주인공 튤립은 부모의 이혼으로 마음의 상처를 가진 소녀로, 작은 로봇 친구와 함께 기차에 올라타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튤립은 기차 여행을 통해 자신의 슬픔과 마주하고 성장합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승객들의 손바닥인데요. 작품 설정에 따르면, 모든 승객은 손바닥에 자신의 숫자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는 해결해야 할 문제 정도를 표현합니다. 주인공은 기차에서 수치로 표현된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해 가며, 비로소 숫자가 0에 도달했을 때 포털이라는 통로를 통해 현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피니티 트레인>에서 기차는 마치 가상의 상담실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등장인물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로 그리고 있습니다. <인피니티 트레인>은 2016년 파일럿 애니메이션으로 공개되었는데요. 애니메이션 마니아 사이에서 시리즈로 만들어달라는 반응이 폭발적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약 3년 만에 첫 번째 시리즈가 공개되었고, 이후 2021년까지 시즌4를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테츠코의 여행>은 지금까지 소개한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인데요. 여행 기고자이자 철도 오타쿠인 요코미 히로히코와 만화가인 키쿠치 나오에가 2002년 <월간 KIKI>에 일본 각지의 로컬선을 취재, 연재한 기행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일본 각지의 로컬선을 2007년 13편으로 제작된 이 애니메이션은 방영 이후 여성 철도팬을 지칭하는 ‘테츠코’라는 용어를 정착시킬만큼 인기를 끌었으며, 비슷한 소재의 드라마가 여럿 제작되는 등 철도 관련 콘텐츠 붐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홋카이도의 소야본선을 달리는 한 칸짜리 디젤열차, 열차가 바다 밑을 지나가는 신비로운 체험이 가능한 세이칸 터널의 해저역 등 인상적인 열차들을 만날 수 있는데요. 실제 배경과 소품, 철도 차량을 모두 실제 그대로 그려 넣기 위해 폐선된 노선들까지 고증을 맞추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테츠코의 여행>에서 철도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닌 일본 전국을 연결하는 문화적 네트워크로서 가치를 전달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한편, 애니메이션에는 없지만 연재 만화에서는 한국의 나한정역과 도계역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특히 나한정역은 스위치백 구간에 위치해 열차가 후진하는 특이한 형태로 운행되는 곳이라 편집장의 스위치백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폐역 직전의 두 역을 취재했다고 전해집니다.
국내에서는 기차를 운송수단이나 매개체가 아닌 주인공 자체로 등장시킨 아동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015년 방영된 <로봇트레인>은 이탈리아 RAI 방송을 통해 유럽에서 방영될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인기를 끌며 K-애니메이션의 저력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로봇트레인>은 기차들이 살아 숨 쉬는 세계 ‘트레인 월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주인공 ‘케이’는 롤러코스터를, 최고의 엔지니어 ‘알프’는 스위스 산악 열차, 최강 파워 ‘빅토르’는 러시아 제설기차, ‘덕’은 베네치아를 테마로 한 수륙양용열차, ‘샐리’는 낭만적인 파리 노면 전차 등을 모티브로 합니다. 이들은 평소 일반 열차처럼 선로를 달리지만,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각자의 특성을 살려 문제를 해결합니다. 성격 또한 차량의 특성을 살려 표현했기 때문에 이에 주목해 보면 어른들도 재미있게 시청할 수 있습니다.
‘트레인 월드’라는 배경 역시 흥미로운데요. 철도라는 소재를 도시 생활과 사회 시스템의 핵심으로 구성했습니다. 도시 전체가 철도망으로 연결되고, 선로, 역, 관제 시스템이 작동하며, 선로와 터널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는다는 설정인데요. 이런 사회 시스템 안에서 캐릭터들이 임무를 수행하며, 이야기를 통해 주로 교통질서, 안전, 협동심 같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사회적 가치들을 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