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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만나보는 건축가의 삶과 일

2025-09-30

소설로 만나보는 건축가의 삶과 일

‘소설이란 삶의 경험이 쌓인 지도를 그리는 일’이라는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소설은 타인의 삶과 직업을 들여다보는 창이 됩니다. 건축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에는 설계 도면 뒤에 숨은 가치관, 열정, 삶의 방식을 오롯이 비춰주는데요. 우리는 그들이 집을 바라보고, 집을 설계하고, 집을 짓는 과정을 따라가며 공간이 어떻게 꿈과 이상을 담아내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9월 ‘독서의 달’을 맞아 건축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4편을 통해 건축가의 일과 삶을 들여다봅니다.

 

건축가의 좌절과 다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요코야마 히데오의 《빛의 현관》

《빛의 현관》은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가 여행 잡지 《려(旅)》에 연재한 소설을 엮어 2019년 단행본으로 펴낸 작품입니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를 배경으로, 급격한 사회적 변화로 좌절한 한 건축가의 재기와 성찰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 아오세 미노루는 버블경제가 꺼진 후 직장도 잘리고 아내와도 이혼합니다. 새로 설계사무소에 취직한 그는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고 Y주택을 설계합니다. 남향을 당연하게 여기던 통념을 깨고 천장과 고창을 활용해 북쪽의 부드러운 빛을 들이고 누레엔식 우드테그와 톱날지붕과 같은 실험 요소를 적용한 이 집은 잡지 <헤이세이 주택 200선>에 실릴 정도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준공 후 의뢰인 가족이 사라지고 1933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일본에 온 독일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만 남아 있었는데요. 소설 속 주인공은 그 Y주택의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에서 잃었던 열정을 되찾게 됩니다.

소설에서는 건축가의 일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고 다양한 건축 용어가 등장해 건축가의 업무에 대해 간접 경험할 수 있으며, 도면 없이 글로만 자세히 서술된 Y주택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한편, 브르누 타우트를 알고 있으면 작가의 의도 파악이 조금 더 쉬워지는데요. 그는 독일 쾰른박림회의 ‘글라스 파빌리온’과 베를린 말밥굽형 아파트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실존인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건물을 짓지 못하자 일본적인 소재들로 모던한 가구와 공예품을 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의자였습니다. 자신이 처한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본인의 미학과 철학을 추구하려는 타우트 모습을 반영해보면 스토리의 흐름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공간에 숨어 있는 사랑의 비밀을 밝히는 건축가 이야기, 백희성의 《빛이 이끄는 곳으로》

건축가 백희성이 쓴 장편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는 프랑스 발드세느 국립건축학교를 졸업하고 장 누벨 사무소에서 일한 작가가 졸업 작품으로 폴메이몽상을 받은 뒤 8년간 파리의 오래된 저택을 방문하며 주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사실과 허구를 엮어 팩션(Faction)으로 지칭되며, 실존하는 저택을 모티브로 건축을 통해 기억과 사랑을 탐구하고 전함으로써 진정성을 더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자신만의 집을 꿈꾸던 젊은 건축가 뤼미에르가 파리 시테섬의 저택을 헐값에 구매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스위스 루체른 수도원에 머무는 집주인 피터를 만나고, 그곳에서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이자 피터의 아버지인 프랑스와가 아들을 위해 숨겨놓은 비밀을 찾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1920년대와 현재를 오가며 건축물과 편지에 스민 암호를 풀어가는 여정은 전쟁과 재개발로 사라진 기억을 되살리고, 건축가를 단순히 건물을 설계하는 기술자가 아닌 사랑과 기억을 공간에 담아내는 예술가로 비춥니다. 뤼미에르가 스위스 수도원 건물에 머물며 공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은 건축가의 역할과 정서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한편, 백희성 작가는 인터뷰에 응했던 파리 고택 주인들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장치들을 소설 속에 녹였을 뿐만 아니라 챕터마다 공간을 묘사한 삽화를 직접 그려 넣어 집에 대한 추억과 이야기를 전해주었던 이들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의 신념을 구현하는 수단으로서의 건축, 아인 랜드의 《파운틴헤드》

《파운틴헤드》는 1943년 발표된 소설로, 미국 여성 작가인 아인 랜드의 대표작입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아인 랜드는 인간의 이성과 개인의 자유, 자유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객관주의 철학을 내세워 미국 우파 사상의 근간을 제공했는데요. 《파운틴헤드》 역시 그의 객관주의 철학을 소설 속 인물에 투영해 생생하게 구현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하워드 로크는 고전주의 설계를 강요하는 학교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퇴학당한 인물인데요. 퇴학 이후 모더니즘 건축의 선구자였으나 시대에 밀려난 건축가 헨리 캐머런을 찾아가 경력을 쌓으며 자신만의 건축관을 세워가게 됩니다. 그는 타협을 거부하며 주류 사회와 충돌하고. 상업적 성공을 위해 타협하는 동창인 피터 키링과 끊임없이 맞섭니다.

이 소설은 뉴딜정책과 집단주의가 퍼지던 19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건축을 통해 집단주의 반발하는 개인주의를 드러냈는데요. 특히 공영주택 설계를 왜곡당하자 로크가 건물을 폭파해 재판에 서는 장면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한편, 주인공 하워드 로크는 르꼬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함께 세계 근대 건축 3대 거장으로 꼽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서 일부 영감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건축을 단순히 기능적 구조물이 아닌 개인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매체로 표현합니다. 작품은 타협하지 않는 건축가의 신념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자신의 꿈을 고수하는 용기와 자유의 가치를 일깨웁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는 건축, 마쓰이에 마사시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2012년 편집자로 일하다 늦깎이 작가로 데뷔한 마쓰이에 마사시의 첫 소설로, 제64회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소설은 중학교 때까지 건축가를 꿈꿨던 작가의 건축에 대한 애정과 깊은 조예가 그대로 녹아 있는데요. 1982년 여름을, 건축학교를 막 졸업한 23세 ‘사카니시’가 일본 건축계의 거장 무라이 슌스케의 설계 사무소에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따뜻한 건축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유명 칼 브랜드인 오피넬의 나이프로 연필을 깎으며 하루를 여는 별장 건축사무소 풍경 묘사를 보면 포근하면서도 원로 건축가의 장인 정신이 느껴집니다.

소설 속 무라이 슌스케는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중시하는 건축가로, 70대 중반으로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며 동양의 전통적 양식에 모더니즘 색채를 담아 참신한 건축 디자인을 선보입니다. 무라이 슌스케는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인 요시무라 준조를 모델로 삼고 있는데요.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시대에 좌우되지 않고, 예술이 아닌 현실 자체로 인간의 삶과 감각을 중시하는 건축관’을 전하며, 이런 건축이 인간에게 어떤 울림을 전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와 대비되는 인물도 등장하는데요. 일본인 최초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인 단게 겐조를 모델로 하고 있는 개발지상주의자인 후나야마입니다. 소설은 두 사람의 대립된 모습을 통해 고도성장과 자연주의가 충돌하던 1980년대 일본을 비추며, 인간의 삶과 공동체에서 건축이 갖는 의미를 일깨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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