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국내외에서 개최되는 수많은 영화제들은 대부분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모아 일정 기간 상영하고, 엄격한 심사를 통해 영화계를 이끌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거나 영화산업 발전을 위해 판매 및 투자에 기여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칸, 베니스, 베를린 국제영화제 등이 모두 이와 같은 형태로 열리고 있죠. 하지만 특정 장르나 주제에 대한 영화만 골라 상영하는 조금 특별한 영화제들도 존재합니다. 다큐멘터리, 코미디, 애니메이션, 호러 등 영화의 장르로 차별화를 시도한 영화제들이 있는가 하면, 환경이나 노인, 여성, 디아스포라, 음식 등 특정 주제에 부합하는 작품들로만 프로그램을 구성해 관객과 만나는 영화제들도 있습니다.
건축도 예외는 아닙니다. 2009년 처음 개최되어 올해로 16번째를 맞이한 서울국제건축영화제(Seoul International Architecture Film Festival: 이하 SIAFF)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지난 16년간 SIAFF는 영화라는 대중적 매체를 통해 건축을 더 깊이 이해하고, 동시에 현대건축의 변화와 흐름을 짚어보는 장으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특히, 아시아 유일의 건축영화제이자, 비경쟁 국제영화제로 오랜 시간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데요. 평소에는 다소 접하기 어려운 건축과 도시에 관한 영화들은 물론, 세계적인 거장의 생애와 주요 작품, 건축 철학 등을 엿볼 수 있는 우수한 다큐멘터리도 함께 감상할 수 있어 건축과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2009년 ‘건축사(The Architects)’를 주제로 선정된 4개국 6편의 영화를 상영하며 비교적 소규모로 시작된 SIAFF는 첫 회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 루이스 칸(Louis Kahn), 렘 콜하스(Rem Koolhaas),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등의 일대기를 담은 수준 높은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특히 모더니즘 건축의 마지막 거장이라 불리는 루이스 칸의 사생아로 태어난 아들 나다니엘 칸(Nathaniel Khan)이 1974년 거리에서 객사한 채 발견된 아버지의 복잡했던 삶을 추적하는 <나의 설계자: 아들의 여행(My Architect -A Son’s Journey)>은 관객들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지금까지도 건축 다큐멘터리를 대표하는 수작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2004년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아 극장에서는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이러한 갈증을 채워준 것이 바로 SIAFF였던 셈이죠.
초기에 건축 또는 건축가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다큐멘터리 작품을 주로 상영하던 SIAFF는 해를 거듭하며 ‘종합예술’이라는 장르적 공통점을 기반으로 한 건축과 영화의 문화적 만남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즉, 영화 속 프레임을 통해 새롭게 바라본 건축, 극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와 공간, 건축적 요소들까지 포함해 선정 작품의 범주를 확장하게 된 것입니다. 5회째를 맞은 2013년 상영작들 가운데 중국과 대만을 대표하는 두 감독, 지아장커(賈樟柯)와 차이밍량((蔡明亮)의 <24시티(24 City)>, <떠돌이 개(Stray Dogs)>가 포함된 것은 SIAFF의 이와 같은 방향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들 작품은 모두 드라마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라져가는 공간과 차가운 도시의 이미지, 그리고 오래된 건물의 역사가 주인공들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데요. 이는 건축을 제외하고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작품 선정의 기준이 되는 ‘건축 영화’의 범위를 넓히고, 각국의 우수한 건축 영화를 발굴해 월드 프리미어 혹은 아시아 프리미어로 상영하며 존재감을 키워온 SIAFF는 2019년 ‘공간, 이야기를 품다(Space and Storytelling)’라는 주제로 열린 11회째부터 프로그램 섹션을 좀 더 세분화해 다양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확보합니다. 가장 먼저 전설적인 건축거장들의 생애와 작품을 소개하는 ‘마스터 & 마스터피스’ 섹션을 시작으로, 도시와 건축의 관계, 그리고 동시대 건축의 화두와 그 현장을 탐구하는 ‘어반 스케이프’ 섹션과 건축의 경계를 다방면으로 확장한 ‘비욘드’ 섹션, 여기에 해마다 다른 주제로 진행되는 스페셜 섹션을 별도로 구성했습니다.
특히, 15년이라는 한 주기의 완성을 기념하는 의미로 기획된 지난해 마스터 & 마스터피스 섹션에서는 SIAFF가 시작된 2009년부터 2023년까지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들의 작품과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며 건축의 가치를 되새기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위스의 은둔형 건축가로 불리는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 일본 건축의 대가 세지마 가즈요(Sejima Kazuyo)와 이토 도요오(Ito Toyo), 반 시게루(Ban Shigeru), 아프리카 최초의 프리츠커상 수상자 프란시스 케레(Francis Kéré)와 중국 최초의 프리츠커상 수상자 왕수(王樹)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어떻게 도시와 공간을 바꾸고, 삶의 터전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지난해 SIAFF는 역대 최다 관람객 수를 기록하기도 했는데요. 18개국에서 초청된 전체 상영작 34편에 대한 관람객 수가 총 5만2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진행된 오프라인 상영이 종료된 후 네이버TV를 통해 온라인 무료 상영을 이어가며 더 많은 이들의 참여와 관심을 유도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페셜 섹션 ‘한옥, 새로운 물결’의 일환으로 은평 한옥마을에서 진행된 한옥투어 및 한옥영화 상영 행사도 많은 일반 관람객과 건축학도들로 하여금 좋은 반응을 얻으며 성황리에 종료되었습니다.
올해도 SIAFF의 차별화된 발걸음은 계속될 예정인데요. 오는 9월 5일 개막을 앞두고 있는 제16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의 주제는 건축과 사람을 연결한다는 의미의 ‘플랫폼(Platform)’입니다. 이는 SIAFF의 존재 이유이자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합니다. 19개국 32편의 작품들이 상영될 올해의 개막작으로는 엘레트라 피우미 감독의 <레디컬 랜드스케이프(Radical Landscapes)>가 선정되었는데요. ‘9999’라는 이름의 급진적인 건축 그룹과 함께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미래 건축을 꿈꾼 아버지 파브리지오 피우미의 유산을 따라가며, 새로운 유토피아를 발견하는 과정을 담은 흥미로운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가장 주목도가 높은 마스터 & 마스터피스 섹션에서는 근대 건축의 개척자부터 현대 건축을 이끄는 젊은 건축가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건축의 미학을 조명하고자 했는데요. 알도 로시(Aldo Rossi),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렘 콜하스(Rem Koolhaas)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아시아 최초 상영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특별히 강화된 부분이 있다면, 아시아를 대표하는 유일한 건축영화제로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건축 영화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인데요. 이를 위해 기존의 마스터 & 마스터피스 섹션을 두 개로 분리해 ‘J-아키텍처’ 섹션을 별도로 구성한 점이 눈에 띕니다.
2024년 올해의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일본의 아마모토 리켄(Yamamoto Riken)이 선정되면서 이제 일본은 무려 9명의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에 마스터 & 마스터피스 스페셜: J-아키텍처 섹션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건축 강국으로 성장한 일본 건축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현 시대의 건축계가 강조하고 있는 가치는 무엇인지 짚어보는 5편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2023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이자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개봉중인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가 포함되어 눈길을 끄는데요.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인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가 청소를 맡아 진행하는 영화 속 공중화장실들은 모두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안도 타다오, 이토 도요오, 쿠마 켄고, 반 시게루 등이 대거 참여한 ‘도쿄 화장실 프로젝트’에 의해 설계된 실제 시설들이라고 합니다.
한편, 어반 스케이프 섹션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통의 현상들을 돌아보고, 이에 대응하는 다양한 형태의 건축적 시도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상영작들 가운데 인도의 작은 유럽이라 불리는 오래된 계획도시 찬디가르(Chandigarh)에서 마주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와 그가 꿈꾼 도시 이야기를 담은 작품, <파워 오브 유토피아(The Power of Utopia- Living with Le Corbusier in Chandigarh)>가 가장 눈에 띄는데요. 얼마 전 EBS 국제다큐영화제에도 초청된 바 있는 수작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그리고 세계를 위해 이 도시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핀란드, 아일랜드, 브라질, 중국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광주와 인천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크고 작은 변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각 장소가 품은 고유한 이야기를 담은 11편의 작품들이 상영될 예정입니다.
올해의 비욘드 섹션은 ‘한국 단편영화와 건축’이라는 주제로 진행되는데요. 총 5편의 우리나라 단편영화들에서 나타나는 건축적 화두를 관객들과 함께 찾아보고, 건축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와 영화를 탐구하는 색다른 경험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페셜 섹션에서는 ‘건축, 예술과 플랫폼’을 주제로 한 4편의 영화가 상영됩니다. 건축의 본질 혹은 시작점으로 돌아가 건축을 예술의 한 분야로 바라보고, 미학의 관점에서 건축을 고민하는 한편, 예술의 주제와 형식을 포함해 예술을 담는 플랫폼이자 매체로서의 건축을 공유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특히, 스위스의 건축가 듀오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설계한 홍콩의 M+미술관 이야기인 <화양연화를 위하여: M+ 그리고 홍콩(In the Mood for Art)>와 스페인의 한 수도사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60년 동안 지은 대성당의 기록을 담은 <어느 수도사의 대성당(The Cathedral)>과 같은 수작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한편, SIAFF는 상영작 감독뿐만 아니라 건축과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상영작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 게스트 토크와 함께, ‘AI 시대, 건축을 담는 플랫폼은?’이라는 주제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게 될 호스트 아키텍트 포럼을 진행합니다. 세부 주제로는 ‘소프트 건축: 경계의 소멸’, ‘디지털 전환(DX)이 바꿀 오늘의 건축’, ‘건축설계 산업에 침투한 알고리즘, 설계자동화는 어디까지 왔나?’ 등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서울 한복판에서 열리는 아시아 유일의 건축영화제를 통해 건축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를 만나고, 건축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특별한 경험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뜻밖의 인생 명작을 SIAFF에서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 규모
: 19개국 32편
(장편 15편, 중단편 17편 / 아시아 프리미어 13편, 코리아 프리미어 8편)
* 영화 상영
: 개막작 상영행사- 9월 5일(목) 19:00 아트하우스 모모 1관
오프라인- 9월 5일(목) ~ 9월 8일(일) 아트하우스 모모
온라인- 9월 8일(일) ~ 9월 15일(일) 네이버TV (네이버 아이디 로그인 및 채널 구독자 관람 가능)
* 예매 방법
: 온라인 예매- 아트하우스 모모, 디트릭스 홈페이지 및 어플리케이션
: 현장 예매- 8월 26일(월)부터 아트하우스 모모 티켓 매표소
: 티켓 가격- 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