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은 하얏트 재단이 근현대 건축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건축 분야에서 높은 위상을 자랑합니다. 해마다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선정된 건축가들에겐 최고의 영광이자 명예로운 순간으로 여겨질 만큼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고 유명한 건축상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건축가들인 프랭크 게리, 노먼 포스터, 자하 하디드, 장 누벨, 안도 타다오 등이 모두 역대 수상자 명단에 올라 있을 정도니까요.
이처럼 프리츠커상이 건축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큰 감동을 주고, 건축계에 중요한 기여를 한 건축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라면, 이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건축과 건축가를 평가하고 응원하는 건축상도 있습니다. 바로 오벨 어워드(Obel Award)와 아가 칸 건축상(Aga Khan Award for Architecture)이 대표적인데요. 이 두 개의 상은 건축의 예술적 완성도나 절대적 영향력 대신, 생태학적 또는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건축의 역할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각종 자연재해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시대에 오벨 어워드와 아가 칸 건축상은 인간과 환경을 위한 건축적 공헌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벨 어워드는 2014년 사망한 덴마크 출신의 사업가 헨리 프로드 오벨(Henrik Frode Obel)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 만들어진 재단의 후원으로 2019년 처음 제정되었습니다. 공익을 위해 보다 나은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하는 건축의 생태학적,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해마다 오벨 어워드의 건축적 철학을 반영한 주제를 제시하고 이에 부합하는 건축 프로젝트를 선정해 시상합니다. 수상자에게는 10만 유로의 상금이 주어지고, 시상식은 매년 덴마크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 올보르그(Aalborg) 또는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에서 개최되는데요. 상금의 규모와 시상식 개최 방식은 모두 프리츠커상과 비슷합니다.
비교적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오벨 어워드는 건축계에 신선한 자극을 선사하며 인간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발굴하고 제시해왔는데요. 오벨 어워드가 추구하는 이러한 핵심 가치는 연도별 주제 및 수상작들의 면모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오벨 어워드의 역사가 시작된 2019년, 첫 번째 주제로 제시된 ‘웰빙(Well-being)’에서는 리조트 개발로 인해 벌목될 위기에 놓인 숲 속 나무들을 인근의 초원으로 옮겨 재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 일본 건축가 이시가미 준야(Ishigami Junya)의 ‘아트 바이오탑 워터 가든(Art Biotop Water Garden)’이 최종 수상작으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이전의 숲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역사가 새로운 장소에 그대로 흡수되었다는 평가와 함께, 환경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며 오벨 어워드의 첫 번째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어 ‘수선(Mending)’이라는 주제로 열린 2020년에는 독일 출신의 건축가 애나 헤링거(Anna Heringer)가 방글라데시 루드라푸르(Rudrapur)에 진흙과 대나무로 지은 2층 규모의 다기능 건물 ‘아난다로이((Anandaloy)’를 수상작으로 선정했습니다. 건물 1층에는 장애인을 위한 치료센터가 자리하고 있고, 2층에는 지역 여성들의 공정무역을 지원하는 텍스타일 스튜디오를 두어 각종 워크숍을 운영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아난다로이는 지역 주민이 요구하는 공간적 솔루션을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을 통한 수선’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층적으로 대응한 사례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2021년에는 조금 다른 성격의 주제를 내놓기도 했는데요. 기후변화의 시대, 도시가 직면한 여러 과제에 대한 획기적인 솔루션을 제공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도시(Cities)’ 자체를 주제로 진행한 경우입니다. 그 결과 비건축가인 파리 소르본대학교의 카를로스 모레노(Carlos Moreno) 교수가 제시한 ‘15분 도시(15-minute City)’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는데요. 이는 도시의 모든 거주자가 도보나 자전거로 이동할 수 있는 15분 이내의 거리에 일, 주거, 일상적인 필요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현재까지 파리는 물론 중국 청두, 호주 멜버른, 콜롬비아 보고타 등 많은 도시에서 실질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들을 만들어낸 도시 이론이자 모델이기도 합니다. 특히, 15분 도시는 팬데믹 이후 전 세계 도시의 회복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되면서 여전히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편, 2022년 ‘배출(Emissions)’이라는 주제로 오벨 어워드를 수상한 건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의 박사과정 학생들이 개발한 새로운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이었습니다. 이는 공장 굴뚝에서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감람석(Olivine)과 결합하여 시멘트의 대체재인 실리카(Silica)를 생산하고, 콘크리트 제조 시 이렇게 만들어진 실리카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콘크리트의 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중요한 건축 솔루션입니다. 건축 자재로서 없어서는 안될 콘크리트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은 물론, 기후변화와 탄소중립의 시대에 관련 산업계가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술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오벨 어워드가 주목한 주제는 ‘적응(Adaptation)’이었습니다. 변화하는 세계에 빠르고 현명하게 적응하기 위한 건축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생태계와 환경, 우리가 만들어낸 구조와 시스템 등의 불확실성에 맞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지속적으로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2023년 오벨 어워드는 미국 뉴욕에 위치한 스태튼 아일랜드(Staten Island) 남쪽 해안에 건설중인 ‘살아있는 방파제(Living Breakwaters)’를 수상작으로 발표합니다. 생태학적으로 설계된 콘크리트 유닛을 돌과 함께 배치한 이 방파제는 높은 파도를 진정시키고 해안선의 침식을 줄이는 일반적인 기능과 함께, 굴이나 물고기 등의 해양 생물들이 살아가는 서식지로서의 역할도 병행하게 됩니다.
오벨 어워드는 이곳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번식해감에 따라 방파제의 내구성은 더욱 높아지고, 해양 생물의 다양성도 복원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설계한 건축회사 스케이프(Scape)에 수상의 영광을 안겼습니다. 자연재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지만 바닷속 생물들도 함께 보호받으며 인간과 자연이 협력할 수 있는 차별화된 디자인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 것입니다. 한편, 현재 기준으로 2024년 오벨 어워드의 주제는 아직 제시되지 않은 상황이며, 올해의 수상작은 심사위원단의 엄격한 선정 작업을 거쳐 매년 가을 무렵 최종 발표될 예정입니다.
1977년 처음으로 제정되어 3년 주기마다 주제가 다른 6개의 건축 작품들을 선정해 시상하는 아가 칸 건축상(Aga Khan Award for Architecture)은 최근 몇 년 사이 건축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상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가 칸 건축상이 다른 건축상과는 다르게 건축의 사회적,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건축적 공헌을 가장 중요한 심사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슬람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부호이자 자선 사업가 아가 칸 4세가 설립한 국제 구호활동 네트워크인 AKDN(Aga Khan Development Network)이 3년마다 새로운 전문 심사위원단을 구성해 아가 칸 건축상의 최종 수상작을 선정하고 있으며, 총 100만 달러에 달하는 상금을 수여합니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2022년 수상작들의 면모만 살펴봐도 아가 칸 건축상이 추구하는 건축적 가치와 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일반적인 공항 건축의 양식을 거부하고 인도네시아 부족의 전통 가옥을 연상케 하는 개방형 구조에, 그 지역의 기후에 걸맞은 녹색 지붕을 얹은 바뉴왕이 국제공항(Banyuwangi International Airport), 여성과 아이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배려한 방글라데시의 로힝야 난민 대응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Community Spaces in Rohingya Refugee Response), 폐허가 된 양조장을 미술, 영화, 강연을 위한 다목적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이란의 아르고 현대미술관&문화센터(Argo Contemporary Art Museum and Cultural Centre), 현지의 지형과 생태적 특성을 고려한 건축 재료와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완성한 세네갈의 카마나르 중학교(Kamanar Secondary School) 등 6개 작품이 선정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아가 칸 건축상이 다른 상과 차별화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건축가뿐만 아니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역할을 수행한 지방자치단체나 건축업자, 건축주, 특정 분야의 장인이나 엔지니어도 수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건축물의 형태적 완성도에 치중하기보다는 해당 프로젝트가 완료되기까지의 과정과 성취감, 주변 환경 또는 지역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고 있는지 등이 더 중요한 가치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최근에는 이러한 아가 칸 건축상의 철학이 프리츠커상을 비롯한 다른 건축상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기준으로 선정된 프리츠커상의 수상자와 아가 칸 건축상의 수상자가 겹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2022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출신의 디에베도 프란시스 케레(Diébédo Francis Kéré)입니다. 케레는 이보다 훨씬 이전인 2004년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 건설한 간도 초등학교로 아가 칸 건축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콘크리트가 부족한 현지 상황을 고려해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고, 조명을 사용하기 힘든 지역적 특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광을 극대화한 건물을 구상했고, 모래 위에 그린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마을 주민들이 공사를 적극 도와줌으로써 건물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간도 초등학교는 아프리카 지역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초 인프라를 확충했다는 의미와 함께, 건물의 재료와 공법에 친환경 시스템을 적용했다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8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인도 출신의 건축가 발크리쉬나 도시(Balkrishna Doshi) 역시 비슷한 사례로 꼽힙니다. 그는 인도의 전통 건축 양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도의 문화와 자연, 정체성을 반영한 저비용 주택 건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 중 1989년 인도르(Indore)시에 완성한 아란야 서민공동주거(Aranya Low Cost Housing) 단지는 저소득층부터 중산층에 이르기까지 8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주택을 제공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습니다. 발크리쉬나 도시는 바로 이 작품을 통해 1995년 아가 칸 건축상을 수상하게 되는데요. 저가의 공동주택단지였지만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공간 배치로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 공동체를 견고히 하는 일에도 크게 기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아가 칸 건축상 수상작들은 모두 하나같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생활 환경을 개선하며, 환경 보호를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건축이 가진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역할과 책임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해 건축가와 지역 주민이 함께 고민의 폭을 넓혀가며 최선의 대안을 찾고자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벨 어워드와 아가 칸 건축상을 비롯한 각각의 건축상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지향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비단 수상작의 결과만은 아닐 것입니다. 건축이 변화하는 시대를 빠르게 읽어내고 적응하는 태도를 보일 때, 우리의 일상은 물론 인류의 미래 역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