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에너지 저장 기술 분야에서 콘크리트가 혁신적인 저장 매체로 주목 받고 있습니다. 이제 콘크리트는 단순히 건축 자재를 넘어서 전기, 열, 중력 에너지 등 다양한 에너지를 저장하고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에너지 저장소’가 된 것인데요. 콘크리트 기반 저장 기술은 특히 재생에너지의 변동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친환경, 경제성, 내구성 측면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늘어나며 대규모 에너지 저장 시스템의 수요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에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과 열 에너지 저장 시스템(TES) 시장도 빠르게 성장 중인데요. 효율성과 경제성을 높이기 위해 벽돌, 소금, 공기 등의 소재를 활용한 열 저장 기술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죠. 정부나 지자체 또한 TES 설치 지원을 위한 세금혜택, 보조금, 저리대출 같은 다양한 인센티브 제공해서 확산이 빨라지는 추세입니다.
시장조사기관 Market Research Future에 따르면, TES 시장은 2024년 약 5억 1,500만 달러에서 2035년 약 12억 달러로 연평균 7.99%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며, ESS 시장 역시 같은 기간 9억 5,400만 달러에서 34억 8,000만 달러까지 연평균 12.48%의 높은 성장세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출처: Market Research Future
콘크리트를 기반으로 한 에너지 저장 기술 역시 ESS, TES, 중력 기반 저장 시스템 등에서 주목 받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현재는 초기단계지만 향후 시장 수요 확대에 따라 독립된 기술 분야로 발전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습니다.
출처: 시멘트에 저장된 전기가 흐르는 모습(MIT/PNAS)
도시의 아파트와 빌딩이 거대한 배터리처럼 작동한다면 어떨까요? MIT 연구팀은 물, 시멘트, 그리고 탄소 블랙(고온에서 불완전 연소된 탄소로 만들어진 미세한 입자로, 전기가 잘 통하는 안정적인 구조의 슈퍼커패시터의 핵심 재료)이라는 흔하고 저렴한 재료를 활용해 새로운 형태의 슈퍼커패시터, 즉 고용량 에너지 축전기를 개발했습니다.
슈퍼커패시터는 전기를 빠르게 저장하고 빠르게 꺼내 쓸 수 있으며, 충전 시간이 짧고 수명이 길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요. 기존의 축전기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으며, 배터리보다 빠른 속도로 전기를 저장하고 사용할 수 있어 배터리와 축전기의 중간 역할을 합니다. 탄소와 그래핀(탄소 원자들 구성된 2차원 물질로 각광받고 있는 신소재 중 하나) 같은 특수 탄소 재료를 이용한 슈퍼커패시터 연구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MIT 연구팀은 기존 재료 대신 시멘트를 사용해 대형 건축물이나 도로에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카본 시멘트 슈퍼커패시터’를 세계 최초로 선보였습니다.
연구팀은 탄소 가루를 시멘트와 물에 혼합하여 단단하게 굳히면 미세하고 복잡한 구멍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요. 이 구멍은 ‘프랙탈 구조’를 띄고 있는데, 이는 나뭇가지가 큰 가지에서 작은 가지로, 더 작은 가지로 계속 뻗어나가는 형태를 말합니다. 이런 구조 덕분에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표면적이 넓어지고, 탄소 가루 덕분에 전도성이 크게 향상되어 전류 흐름이 원활해집니다.
출처: 파퓰러사이언스
실제 실험에서는 이 시멘트 슈퍼커패시터 3개를 연결해 작은 LED 전구를 켜는 데 성공했고, 연구팀은 이 기술을 자동차 배터리 크기부터 시작해 가정용 전력 저장 장치까지 확장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한 변의 길이가 약 3.5m인 콘크리트 큐브 하나는 약 10kWh의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데, 이는 일반 가정에서 하루 동안 사용하는 전력량입니다.
이 기술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에너지 저장 장치의 구조 자체를 콘크리트로 구현했다는 점과, 크기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얇고 작은 형태부터 두껍고 큰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설계가 가능해 단시간 전력 공급이 필요한 소형 기기부터, 태양광으로 만든 전기를 낮에 저장해 밤에 가정 전체에 공급하는 주택형 시스템까지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콘크리트 구조물 자체가 에너지를 저장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죠. 전기차 충전소, 스마트 주택, 에너지 저장 기반 시설 등 다양한 분야로의 응용 가능성도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전기를 저장하는 일 외에도 콘크리트는 열을 잘 저장하고 유지하는 특성 덕분에 ‘열 배터리’로 불립니다. 이러한 특성을 이용해 공장 등에서 발생하는 남는 열이나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를 열에너지로 변환해 콘크리트에 저장할 수 있습니다.
저장된 열은 필요할 때 스팀으로 전환해 전력 생산이나 난방에 활용할 수 있어, 재생에너지의 전력 저장 한계를 보완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재생에너지를 이용해 콘크리트를 600℃ 이상 가열하면, 내부 배관을 통해 흐르는 물이 뜨거운 콘크리트로 인해 증기로 변합니다. 이렇게 생산된 스팀은 터빈을 구동하거나 산업 현장 열원으로 활용됩니다. 콘크리트를 매개로 한 다양한 열 저장 기술은 이미 산업 현장과 발전소에서 실증 및 상용화가 활발히 진행 중에 있는데요. 이 분야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 기반 론도에너지(Rondo Energy)와, 노르웨이의 에너지네스트(EnergyNest)가 대표적 기업으로 손꼽힙니다.
출처: Rondo Energy
론도에너지는 단열 용기에 내화벽돌을 쌓아 1,500℃에 달하는 고온의 열을 24시간 이상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2023년 3월 캘리포니아의 에탄올 공장에 첫 상업용 시범 시스템을 배치하고 열배터리를 가동했는데요. 재생에너지로 생성한 전기를 전기저항 방식으로 열로 바꾸고, 저장된 열은 벽돌 사이를 통과하는 공기를 1,000℃ 이상의 고압증기로 변환해 다양한 산업 공정에 공급됩니다. 자동차 엔진보다 높은 온도까지 저장이 가능해 화석연료 대체 가능성이 크며,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실증 프로젝트가 운영 중에 있습니다.
에너지네스트는 2022년 고성능 콘크리트 ‘Heatcrete’를 활용한 모듈형 열 저장 시스템을 개발했는데요. 이 시스템은 벨기에의 한 공장 에서 상용화돼 1초 단위로 스팀 저장과 방출을 반복하며 1년 동안 4,000회 이상의 충·방전 테스트를 안정적으로 수행해 실용성을 입증했습니다.
이외에 MIT 연구진이 설립한 미국 스타트업 ETS는 ‘E-브릭’이라는 전도성 벽돌을 개발했습니다. 일반 벽돌과 유사한 형태지만 전기를 흘려보내면 최대 1,800℃까지 뜨거워지는 게 특징입니다. ETS는 이 벽돌을 수천장 쌓아 거대한 상자에 넣고 전기로 데워서 열을 저장하는 Joule Hive Thermal Battery를 만들었는데, 이 장치는 한마디로 전기로 충전하는 초고온 벽돌 난로입니다. 석탄이나 가스를 태워 얻던 열을 E-브릭이 대신하게 되면서 공장들은 석탄이나 가스를 덜 쓰게 됐고, ETS는 철강, 시멘트 등 고온 공정 산업의 탈탄소화를 목표로 미국 에너지부 지원을 받아 텍사스에서 상용 파일럿 시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에너지 저장방식은 양수발전으로, 에너지 저장 전체의 약 95%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스타트업인 에너지 볼트(Energy Vault)는 물을 끌어 올렸다가 흘려보내며 전기를 생산하는 양수발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밀도가 높은 콘크리트를 크레인으로 들어 올렸다가 내리면서 전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전기 사용이 많지 않은 시간대에 남는 전기를 이용해 거대한 콘크리트 블록을 움직이며 전기를 만들어내는 이 방식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효율성이 높아 재생에너지를 저장하는 기술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1분에 100m를 들어 올린 35톤 무게의 콘크리트 벽돌에 약 10MWh의 전력을 저장할 수 있으며, 시스템 운영에 사용되는 에너지를 제외하면 약 80~85%의 전력을 저장하는 효율을 내죠.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양은 설치 규모에 따라 달라지지만, 최대 80MWh에 달하는 대형 설비는 약 2,000가구가 8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양수발전에 비해 댐이나 대규모 저수지가 필요 없어 지형에 대한 제약이 줄고, 리튬이온 배터리처럼 시간이 지나면 성능이 떨어지는 열화현상도 없을뿐더러 희소한 자원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소재 수급 문제에서도 자유롭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에너지 볼트는 블록을 제작할 때 광산 찌꺼기나 탄 연소 잔여물, 해체된 풍력 터빈 날개 같은 산업 폐기물을 활용하고 있으며, 최소 30년 이상 사용이 가능한 구조물이라 유지비나 교체 부담도 적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도시 외곽이나 평지, 지하 공간에도 설치할 수 있는 이 시스템은 무거운 블록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는 동작 하나로, 전기를 안전하게 저장하고 필요한 순간 공급할 수 있어 현실적이고 강력한 해법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콘크리트를 활용한 저장 기술은 기존 배터리와 발전 방식의 한계를 넘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기술 혁신과 시장 성장, 친환경성을 갖춘 이 기술은 산업 현장과 일상에 안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며 재생에너지 시대의 필수 솔루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죠. 앞으로 더욱 큰 주목을 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콘크리트 에너지 저장 기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에너지 혁신은 콘크리트라는 익숙한 소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