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일반적인 건축물의 형태는 대부분 직선을 기반으로 한 네모 반듯한 사각형 모양일 것입니다.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도시의 풍경 역시 높은 직사각형 모양의 빌딩들이 모여있는 풍경이니까요. 이는 20세기 초반부터 이어진 모더니즘 건축의 영향일 것입니다. 이 무렵부터 건축은 기능적 측면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간결하고 효율적인 설계가 중시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필요한 장식이나 복잡한 디자인은 배제되었고, 콘크리트, 철근 등 건축 재료와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단순하면서도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몰두하게 됩니다.
이렇게 1980년대 후반까지 길게 이어진 모더니즘 건축 양식을 거부하고, 기존 건축의 기능적이고 안정적인 직선 형태에서 과감히 벗어나 곡선과 사선 등 좀 더 새로운 형태의 건축을 구조적으로 표현하고자 시작된 것이 바로 해체주의 건축인데요. 공간의 최대 효율을 중시하던 이전과는 달리 비틀어지고 휘어진 형태로 대표되는, 자유로운 곡선의 비기하학적인 건축물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정형의 건축에서 비정형의 건축으로 변화를 꾀한 것이죠. 이로 인해 마치 춤을 추듯 둥글게 휘어지고 구겨진 건물들이 도시의 상징이 되고, 쇠퇴한 도시의 운명을 바꾸는 일도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중심에는 해체주의 건축의 대명사와도 같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를 비롯해 곡선의 여왕 자하 하디드(Zaha Hadid), 빛의 장인 장 누벨(Jean Nouvel) 등 가히 비정형 건축의 대가라 불릴 만한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대담하면서도 역동적인 건축을 세상에 내놓으며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선물했던 그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파격적인 시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캐나다 출신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해체주의 건축을 창시하고 동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해체주의를 실현한 인물입니다. 1996년 그가 설계한 체코 프라하의 댄싱 하우스(Dancing House)는 해체주의의 서막과도 같은 작품인데요. 뒤틀리고 구겨진 듯한 건물의 독특한 외관 때문에 당시 수많은 논란과 비판을 낳기도 했습니다. 평론가들로부터 예술적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건물로서의 기능과 효율을 고려하지 않은 낭비적 건축이자, 바로크와 고딕, 아르누보풍 건물들로 채워진 프라하의 경관마저 해치는 근본 없는 건물이라는 평가를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댄싱 하우스를 기점으로 이후 그의 행보는 오히려 더 대담해집니다.
1997년 프랭크 게리는 드디어 희대의 걸작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쇠락의 길을 걷던 스페인의 공업도시 빌바오의 지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대책으로 문화예술산업을 계획한 바스크 정부가 그에게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를 제안했고, 이 도전에 흔쾌히 응한 프랭크 게리의 작품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도시의 원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전복적인 디자인 때문이었는데요. 마치 미래 세계에서 불시착한 우주선을 닮은 듯한 강한 곡선의 건물 외관은 빛이 그대로 반사되는 티타늄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이 문제적 미술관이 개관한 이후 빌바오라는 작은 도시는 매년 1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세계적인 문화예술도시로 변신했고, 그 결과 도시에 새로운 번영과 부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의 건축물이 도시의 운명을 바꾼 셈이죠. 이후 이와 비슷한 현상들을 가리켜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과 영향력을 증명한 사례입니다.
이제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엔젤레스로 눈을 돌립니다. 2003년 그가 완성한 건물은 바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었습니다. ‘미국을 바꾼 10대 건축’에도 선정되었을 만큼 세계적인 문화 명소로 자리매김한 이 건물의 외관은 온통 물결치듯 반짝이는 곡선의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로 가득합니다. 이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로스엔젤레스의 바닷바람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바람에 펄럭이는 돛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건물의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돛을 달고 항해를 떠나는 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 내부는 더글러스 전나무와 오크 등의 목재를 사용해 매우 클래식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이처럼 반전 매력으로 가득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예술을 위한 최고의 공간인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자유로운 비정형의 건축물로는 캐나다 온타리오 미술관, 프랑스 루마 아를 타워, 미국 와이즈만 아트 뮤지엄, 독일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90세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최근작을 이제 서울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데요. 바로 2019년 청담동에 문을 연 루이뷔통 메종 서울입니다. 그가 수원화성과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했다고 알려진 건물 외관은 하얀 도포 자락을 펄럭이는 선비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닮았습니다. 네모난 건물의 지붕 위에 물결치듯 얹어진 유리 패널들은 익숙한 도시의 풍경에 뜻밖의 역동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2014년, 서울 한복판에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이하 DDP)가 들어섰을 때의 충격을 기억하시나요? 마치 우주 어딘가에서 불시착한 거대한 비행물체를 보는 듯한 낯선 경험이었는데요. 바로 이 DDP를 설계한 건축가가 프랭크 게리를 잇는 비정형 건축의 대가 자하 하디드입니다. 당시 ‘환유의 풍경(Metonymic Landscape)’이라는 주제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동대문의 역동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그녀는 물처럼 유연하게 흘러가는 4만5천여 개의 알루미늄 패널 외관을 선택합니다. 이는 DDP가 바라보는 시간이나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한데요. 처음에는 주변 경관과 역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 여론이 많았지만, 논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도시의 보편적 관념과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해석을 고집한 자하 하디드의 DDP는 현재 서울이라는 도시를 상징하는 글로벌 랜드마크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남긴 무수한 작품들 가운데, 중국 주장강변에 위치한 광저우 오페라 하우스(Guangzhou Opera House) 역시 DDP와 마찬가지로 유려하고 예측 불가능한 곡선으로 유명합니다. 자하 하디드는 오랜 시간 동안 강가에서 다듬어진 두 개의 조약돌을 모티브로, 자연환경에 의한 변화에 집중한 디자인 콘셉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건물 외관과 내부 모두에 고스란히 드러나는데요. 광저우 오페라 하우스의 외벽은 투명한 유리와 섬유 보강 콘크리트 패널인 ‘GFRC’를 사용해 조약돌의 매끄러운 표면과 곡선을 완벽하게 구현했고, 내부 역시 과감한 수직 공간과 높은 층고 등을 활용해 마치 거대한 협곡을 걷는 것 같은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주로 활동한 자하 하디드에게 어린 시절 보았던 끝없는 사막의 풍경은 영감의 원천이었고, 자연에 의해 시시각각 달라지는 곡선의 이미지는 그녀의 건축 철학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2013년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 세워진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 이하 HAC)는 이러한 자하 하디드의 건축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자 그녀가 남긴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데요. 유년시절 그녀가 줄곧 보고 자랐던 모래언덕과 매우 흡사한 형태로, 자유로우면서도 안정적인 곡선의 흐름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총 면적 15,514㎡ 규모를 자랑하는 HAC는 회백색 건물 대부분이 드라마틱한 곡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바람에 의해 생겨나는 모래언덕의 미세한 주름을 연상하게 하는 외관은 트러스를 이루는 스틸 프레임에 GFRC가 사용되었습니다. 내부는 컨퍼런스홀과 갤러리, 박물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나라의 DDP와는 다르게 내부 공간까지도 곡면의 형태가 그대로 이어지며 독특한 공간감을 보여줍니다.
2004년 자하 하디드는 여성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그녀가 추구했던 유기적이고 이형적인 건축 디자인이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설계한 변화무쌍한 곡선의 공간 안에서 뜻밖의 영감을 얻고, 또 공간적 혹은 기능적으로도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2016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자하 하디드를 대신해 현재는 그녀가 설립한 건축사무소 ‘ZHA(Zaha Hadid Architects)’가 비정형 건축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구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은 사실 앞서 언급한 프랭크 게리와 자하 하디드의 해체주의 건축보다는 그들이 거부한 모더니즘 건축에 조금 더 가까운 편입니다. 하지만 그를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테두리 안에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한 설계에 방점을 두고, 자신만의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어냈으니까요. 그에게 중요한 건 스타일이 아니라 주변환경이 가진 맥락과 건물 혹은 부지가 가진 장소의 특수성, 그리고 시간의 연관성을 모두 고려한 통합적 접근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프랑스 파리의 아랍문화원(Arab World Institute),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La Foundation Cartier) 등이 증명하듯 그의 작품들은 도시의 풍경을 변화시키면서도 매끄럽게 조화를 이루는 탁월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것, 규칙적이지만은 않은 것, 경탄이 있는 것’이 미의 본질이라 믿으며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해온 장 누벨의 최근작 가운데,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Louvre Abu Dhabi)은 건축의 요소로서 빛과 그림자를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직경 180m 크기의 거대한 돔 형태를 띠고 있는 이 건물의 지붕은 사막 오아시스의 야자수 잎사귀들이 겹겹이 겹쳐 만든 그늘에서 착안해 만들어졌는데요. 격자 패턴을 구성하는 8개의 레이어(스테인레스 스틸 4개, 알루미늄 4개)를 통해 빛을 미세하게 분산시켜 내부로 들어오는 빛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돔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각형의 매스들을 박물관 용도로 따로 설계했는데, 이마저도 자유분방하게 배치함으로써 바다 위의 섬처럼 보이는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9년, 장 누벨은 가히 비정형 건축의 놀라운 진화라 할 만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데요. 바로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 건립된 카타르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of Qatar)입니다. 단번에 시선을 압도하는 독특한 외관 디자인의 모티브가 된 것은 ‘사막 장미(Desert Rose)’라고 하는 희귀한 결정체인데요. 카타르를 비롯한 중동권의 사막에서 모래와 미네랄의 수분 증발에 의해 드물게 형성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장 누벨은 사막 장미의 잎사귀들이 뒤엉킨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각각의 크기와 모양이 다른 316개의 원형 디스크가 서로 교차하고 맞물리는 형태로 설계했습니다. 이를 위해 총 7만6천여 개의 모래 색상 GFRC를 사용해 정교함을 더했고, 꽃잎에 해당하는 디스크 하나를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만 4개월 이상이 소요되었을 정도로 공을 들였습니다. 가장 큰 디스크의 직경은 87m에 달하고, 디스크의 가장자리는 모두 꽃잎처럼 보이도록 최대한 가늘게 마감하는 등 어려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가로로 350m나 길게 이어지는 거대한 원형 디스크들의 유기적인 향연은 최첨단 3차원 빌딩정보시스템(3D BIM)을 활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장 누벨의 최고 역작이라 불리는 카타르 국립 박물관의 까다로운 시공을 맡아 진행한 기업이 우리나라의 현대건설이었다는 사실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 장 누벨이 진행중인 수많은 프로젝트 가운데 2024년 완공을 앞두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 알울라 지역의 샤란 리조트(Sharaan Resort) 역시 모든 룸과 발코니를 포함한 인공 시설물을 자연 그대로의 바위와 동굴 내부로 들여와 설계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이 펼쳐질 것으로 보이는데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울라의 초현실적인 자연 풍광과 고대 유산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또 하나의 위대한 걸작의 탄생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