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화가 미셸 들라크루아(Michel Delacroix)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1930년대 파리의 ‘아름다운 시절’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90세를 훌쩍 넘긴 고령이 된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아득히 먼 소년 시절, 그가 파리 시내를 걸으며 보았던 도시의 풍경과 건물들을 떠올리며 본인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하고 있는데요. 그에게는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고 모든 일상이 파괴되기 전인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파리의 ‘아름다운 시절’은 미셸 들라크루아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속된 평화로운 시대를 의미합니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파리는 경제와 문화, 미술, 문학, 건축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며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은 파리의 예술가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되었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파리를 화려한 예술과 고급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중 우리가 파리라는 도시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에펠탑(Eiffel Tower)이나 그랑 팔레(Grand Palais), 오페라 가르니에(Opera Garnier) 등의 건축물도 바로 이 때 등장하는데요. 고전주의부터 아르누보, 아르데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재했던 벨 에포크 시대의 화려하고 독창적인 건축물들은 지금도 파리의 상징처럼 도시 곳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며 열린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는 당시 파리의 일반적인 건축 양식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낯선 철골 구조물의 등장으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는데요. 건축가 구스타프 에펠(Gustave Eiffel)이 설계한 300m 높이의 에펠탑(Eiffel Tower)이 바로 그것입니다. 에펠탑은 박람회장으로 들어가는 게이트 역할을 했는데, 당시 독보적인 높이로 사람들에게 가히 충격에 가까운 경험을 선사했고, 이는 19세기 프랑스 건축 기술의 승리이자 새로운 시대의 전환점을 맞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1931년 미국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완성되기 전까지 에펠탑은 인간이 만든 최고층 건축물의 기록을 한참이나 이어갔고, 1909년 잠시 해체될 위기를 맞았지만 송신탑으로 재활용하기로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는 물론 프랑스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죠.
구스타프 에펠은 이 거대한 철탑의 무게를 흔들림 없이 지탱하기 위해 대형 콘크리트에 기초한 4개의 철각 위에 탑을 쌓아나가는 구조를 선택합니다. 또, 강한 바람으로부터 고층 탑이 받게 될 압력을 정확하게 계산해 기울어질 염려가 없도록, 최대한 안전하고 가볍게 설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만5천여 개의 강철 조각과 105만 개가 넘는 못, 그리고 7,300톤이 넘는 철을 사용해 웅장하면서도 낭만적인 에펠탑을 완성해내죠. 1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에펠탑은 전 세계 여행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요. 특히, 올 여름 개최되는 2024 파리 올림픽의 개막식과 일부 경기가 에펠탑 근처에서 열릴 예정이고, 선수들이 받게 될 올림픽 메달 뒷면에는 에펠탑 건설 당시에 사용되었던 18g의 철조각을 육각형 모양으로 조각해 넣었다고 하니 에펠탑의 상징성과 대표성은 여전히 강력한 것 같습니다.
1900년, 프랑스는 다시 한번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게 되는데요. 이전보다 규모는 더욱 커졌고 또 한번 그랑 팔레(Grand Palais)와 쁘띠 팔레(Petit Palais)라는 경이로운 건축물을 선보입니다. 먼저 유럽 최대 규모의 유리 천장을 자랑하는 그랑 팔레의 중앙홀은 13,500㎡의 면적에 가로 길이 200m, 폭 55m에 달하고, 강철 6천여 톤과 석재 20만 톤을 사용해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웅장한 내부 공간은 높이 43m의 거대한 돔 형태의 유리 천장으로 덮여있고, 이를 다시 얇은 강철 기둥들이 지탱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고전주의 양식의 석조로 된 전면부(Façade)와 아르누보 양식의 철재 마감이 조화를 이루는 그랑 팔레는 현재 각종 전시를 개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곳 역시 올림픽 기간 중 태권도와 펜싱 경기가 진행될 예정인데, 이를 위해 2020년부터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공사까지 진행하고 있어 한층 새로워진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파리 제8구에서 그랑 팔레와 나란히 마주보는 위치에 세워진 쁘띠 팔레에는 그랑 팔레와 매우 유사한 형태의 8각 원형 중정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이는 두 곳 모두 샤를 지로(Charles Girault)라는 같은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우아한 곡선의 계단과 이를 장식하는 연철 난간, 파리의 문장으로 장식된 메인 출입구 등이 쁘띠 팔레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풍부한 채광과 넓은 전시 공간을 자랑하는 쁘띠 팔레는 박람회가 끝난 직후인 1902년부터 지금까지 파리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021년 여름, 프랑스 명품그룹 루이비통(LVMH)이 인수한 벨 에포크 시대의 백화점이 16년에 걸쳐 진행된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문을 열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파리 퐁네프 다리 인근에 위치한 이 오래된 백화점의 이름은 ‘사마리텐(La Samaritaine)’으로, 190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아르누보 양식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화려한 꽃무늬 타일과 타이포그래피로 외관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1870년 작은 양장점으로 시작된 사마리텐의 역사는 1900년대 초, 벨기에 출신 건축가 프란츠 주르댕(Frantz Jourdain)이 설계를 맡으면서 아르누보 건축의 특징을 갖추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강철로 건물의 뼈대를 올리고, 그 위에 유리 지붕을 올려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또, 천장 바로 아래 벽면에는 공작새와 다양한 식물들이 그려진 황금색 프레스코화를, 대칭 구조의 중앙 계단과 난간에는 금장 덩굴 장식을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사마리텐은 1920년대에 또 한번의 확장 공사를 거치며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양식의 특징을 모두 가진 독특한 건축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처럼 150년이 넘는 사마리텐의 건축적, 역사적 의미를 계승하기 위해 오랜 시간 완벽한 복원을 진행한 끝에 재탄생한 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21세기의 사마리텐인 것이죠. 그러나 한편으론 새로운 변화와 실험을 추구하기도 했는데요. 센 강을 바라보고 있는 전면부는 19세기 아르누보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후면부에 해당하는 리볼리(Rivoli)관의 파사드는 343개의 유리 패널을 붙여 거대한 물결 모양의 독특한 외관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2010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하기도 한 일본의 건축가 그룹 ‘사나(SANAA)’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는데, 과거와 현재를 잇고 시대를 융합하는 하나의 장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912년 파리 오스만 대로에 완공된 갤리러 라파예트(Galeries Lafayette) 백화점은 벨 에포크 시대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건물입니다. 건축가 페르디낭 샤누(Ferdinand Chanut)와 유리 공예가 자크 그루버(Jacques Grüber)가 디자인한 네오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운 돔 지붕(cupola)은 유리로 만든 하나의 예술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경이롭습니다. 특히, 시간이나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광에, 10개의 기둥과 함께 거대한 꽃의 모습을 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더해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처음 갤러리 라파예트가 완성되었을 당시, 수많은 벨 에포크 시대 사람들이 이곳 테라스에서 파리의 전망을 즐겼던 것처럼, 갤러리 라파예트는 지금도 연간 방문객 수가 1억2천만 명에 이를 정도로 파리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 중 하나입니다.
파리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인 팔레 가르니에(Palais Garnier) 역시 1875년 벨 에포크 시대 초기의 산물입니다. 우리에겐 ‘오페라 가르니에’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죠.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Charles Garnier)가 설계한 이 극장은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보자르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1964년 30m 높이의 중앙홀 천장에 새롭게 덧그려진 마르크 샤갈의 그림 ‘꿈의 꽃다발’과 6톤의 무게를 자랑하는 초대형 샹들리에로 유명한 곳입니다. 또 세계적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베토벤, 모차르트 등 고전 음악가들의 청동 흉상으로 전면 파사드를 장식했고, 내부 역시 대리석으로 만든 웅장한 계단과 당시 사교 집단의 응접실로 사용된 그랑 푸아이에(Grand Foyer) 등 화려한 장식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벨 에포크 시대의 일반 대중들이 즐겨 찾던 공간으로 이동해 볼까요? 먼저 리옹 역 안에 위치한 르 트랑 블루(Le Train Bleu)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지어진 레스토랑인데요. 새로운 기차역들이 빠르게 생겨나며 본격적인 여행의 시대를 알린 때였던 만큼, 르 트랑 블루와 같은 공간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곳은 화려한 금빛 장식과 정교한 조각상, 반짝이는 샹들리에까지 벨 에포크 시대를 떠올리는 인테리어로 가득했는데요. 레스토랑 내 각각의 개별 공간들은 프랑스의 도시와 지역을 대표하는 테마로 꾸며졌으며, 당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던 예술가들의 그림 41점이 르 트랑 블루 안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1893년, 당대 남성들의 사교장으로 문을 연 맥심 드 파리(Maxim’s de Paris)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공간을 리뉴얼한 후 코코 샤넬,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수많은 명사들이 즐겨 찾는 최고의 사교 공간으로 거듭납니다. 1981년 프랑스 정부는 맥심 드 파리 레스토랑을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했고, 이후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이 인수하면서 건물 3층에 아르누보 박물관을 만들어 예술적 감성으로 충만했던 벨 에포크 시대를 추억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셸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파리의 대표 명소이자 1889년 오픈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예술가의 거리 몽마르트를 지키고 있는 댄스홀, 물랭루즈(Moulin Rouge)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빨간 풍차’라는 뜻을 가진 물랭루즈의 건물 옥상에는 실제로 빨간 풍차 모양의 조형물이 우뚝 서있습니다. 파리 사교계의 왕자로 불리던 조제프 올레와 사업가 샤를 지들러가 공동으로 설립했으며, 당시 유명한 춤꾼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부유층들이 모여들었던 곳이자 프랜치 캉캉(일명 캉캉춤)이 최초로 공연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191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0년 만에 재건되기도 했는데, 아직도 내부에는 19세기 말 파리의 낭만적인 장식 등이 많이 남아있어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벨 에포크 시대의 감성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