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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고나다 감독이 담아낸 모더니즘 건축의 아름다운 풍경

2023-03-07

코고나다 감독이 담아낸 모더니즘 건축의 아름다운 풍경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다양한 풍경에서 건축물을 빼면 어떤 모습일까요? 상상이 가시나요?  그만큼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함께하는 공간마다 크고 작은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은 때때로 늘 나와 함께하는 익숙한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 익숙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고, 또 누군가는 익숙한 것에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 <콜럼버스>의 두 주인공, 케이시(헤일리 루 리차드슨)와 진(존 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건축을 바라보는 진중한 태도와 시선, 영화 <콜럼버스>

이 영화를 연출한 한국계 미국인 코고나다(Kogonada)는 지난해 애플티비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의 대성공 이후 전 세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감독입니다. <콜럼버스>는 2017년 발표된 그의 장편 데뷔작으로,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가리켜 ‘건축을 이토록 아름답게 다룬 영화는 없었다’는 극찬을 하기도 했고, 한 건축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현대건축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작품이 촬영된 미국 인디애나주의 작은 도시 콜럼버스가 실제로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로 불리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코고나다 감독의 건축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선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평과 수직, 대칭으로 이어지는 영화 속 모든 장면은 마치 하나의 잘 지어진 건축물처럼 견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럼, 영화를 만나보기에 앞서 모더니즘 건축에 대해 잠깐 살펴볼까요? 19세기 이전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비판하며 1920년대에 시작된 모더니즘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건축가 루이스 설리반의 말로 대변할 수 있듯이 건축의 기능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요소를 모두 거둬내고 보다 간결하고 실용적인 측면을 고민하게 된 것이죠. 또, 이때부터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산물인 철과 콘크리트, 유리 등을 입면부에 사용한 건물들이 등장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모더니즘 건축의 특징은 영화 <콜럼버스>에 등장하는 건축물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리넨 부자가 완성한 도시의 랜드마크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 속 콜럼버스 건축 여행을 떠나볼까요? 저명한 한국계 건축과 교수의 아들인 진은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로 인해 콜럼버스에 원치 않는 방문을 하게 되고, 숙소 근처를 산책하던 중 우연히 건축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미래를 꿈꿀 수도, 이곳을 떠날 수도 없는 케이시를 만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콜럼버스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데요. 그들이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바로 1942년 엘리엘 사리넨(Eliel Saarinen)이 설계한 퍼스트 크리스천 교회(First Christian Church)입니다. 미국 최초의 모더니즘 종교 건물 중 하나로, 콜럼버스라는 도시가 모더니즘의 메카로 거듭나게 되는 위대한 여정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교회 정면에서 바라보면 문의 위치와 십자가 표식 등이 모두 오른쪽으로 치우친 비대칭 형태를 띠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를 직육면체의 그리드 패턴이나 크기가 다른 유리창 등을 활용해 전체적인 균형감을 잃지 않도록 설계했습니다. 케이시는 이곳에서 건축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진에게 엘리엘 사리넨의 ‘비대칭의 균형’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합니다.

First Christian Church. Courtesy of the Columbus Area Visitors Center

다음 만남에서 그들이 찾은 곳은 엘리엘 사리넨의 아들이자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이 1954년에 설계한 어윈 컨퍼런스 센터(Irwin Conference Centre)입니다. 구 어윈 유니온 뱅크(Irwin Union Bank) 건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케이시가 콜럼버스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건물로 등장하죠. 당시의 은행들이 벽돌이나 돌을 사용한 권위적인 네오클래식 건물이었던 것에 반해 통유리로 된 단층 구조에 새하얀 돔 지붕을 얹은 시민친화적인 건물로 설계되었습니다. 특히, 미국 최초로 전면에 유리를 사용한 최초의 은행 건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열심히 이 건물에 대해 설명하는 케이시에게 진은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건축이 어떻게 당신의 마음을 움직였는가에 대해서 말이죠. 감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외의 선택을 합니다. 그녀의 대답을 음성으로 들려주는 대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행복한 표정을 비출 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이 건물을, 그리고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죠.

Irwin Conference Center. Courtesy of the Columbus Area Visitors Center

 

영혼이 깃든 모더니즘 건축의 향연

영화는 도시가 품고 있는 모더니즘 건축물뿐만 아니라 이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도시를 채우고 있는 익숙한 자연의 풍경들을 자주 등장시킵니다. 이를테면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들, 울창한 숲과 나무, 경쾌하게 흘러가는 강물 같은 것들 말이죠. 건축은 결국 주변의 자연 또는 환경과 어우러질 때만이 그 역할과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에 서있던 진과 케이시가 병동을 연결하는 교각을 바라보며 나누는 이야기 또한 건축이 가진 치유기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972년 제임스 폴셱(James S. Polshek)이 설계한 콜럼버스 지역 병원 정신과 병동(Columbus Regional Hospital Mental Health Services)은 건축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중시해온 그의 고집이 느껴지는 건물입니다. 건축은 결국 자연과 어우러질 때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던 제임스 폴셱은 이후에도 뉴욕 맨하탄 자연사박물관의 로즈센터와 빌 클린턴 대통령센터 등을 설계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을 넘어설 즈음 높고 뾰족한 첨탑을 사이에 두고 숲 속에서 마주한 두 사람. 콜럼버스의 랜드마크라 불리는 노스 크리스천 교회(North Christian Church)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육각형으로 된 건물 중앙에 우뚝 솟은 첨탑의 높이는 무려 60m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역시 1964년 에로 사리넨이 설계한 것으로, 그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작품으로도 유명합니다. 내부는 첨탑 아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고요하고 숭고한 느낌을 강조한 동시에 양쪽으로 계단식 좌석을 만들어 누구나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완성하였습니다. 진은 이곳에서 아버지의 종교가 뭐냐는 케이시의 질문에 ‘모더니즘. 영혼이 깃든 모더니즘’이라고 대답하는데요. 노스 크리스천 교회야말로 사리넨이 구조에 대한 이성적인 해석을 통해서 완성한 ‘영혼이 깃든 모더니즘의 결정적 산물’이라 할 것입니다. 결국 건축에 있어 영혼이란, 그곳을 살아가는 이들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며, 그것이 온전히 깃든 건축이야말로 진정한 모더니즘의 실현이 될 테니까요.

North Christian Church. Courtesy of the Columbus Area Visitors Center

영화 속 진은 때때로 콜럼버스의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건물의 상단이 여름 하늘에 걸친 풍경은 시각적 새로움을 주기도 하는데요.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뷰를 선사하는 건물이 바로 콜럼버스 시청사(Columbus City Hall)입니다. 진과 케이시가 계단에 걸터앉아 빵을 나눠먹으며 케이시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공간입니다. 약 5,600㎡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은 유리로 된 반원형의 건물 앞에 넓은 계단이 있고, 중앙 공간은 뚫려있는 독특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 건물을 감싸고 있는 벽돌 빔은 양쪽으로 길게 늘어져 중앙에서 서로 만나지만 완전히 연결되지는 않도록 그 사이에 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는 공공기관의 권위주의보다는 포용력을 강조한 디자인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1971년 건축회사 SOM(Skidmore, Owings and Merrill)이 진행한 콜럼버스 마스터플랜의 일환으로 완공되었습니다. SOM은 우리나라의 63빌딩과 부산 해운대 엘시티(LCT)를 설계한 회사이기도 합니다.

Columbus City Hall. Courtesy of the Columbus Area Visitors Center

 

건축과 인간의 유기적 상관관계

이밖에도 영화 <콜럼버스>를 통해 만날 수 있는 모더니즘 건축은 훨씬 더 많습니다.

Cleo Rogers Memorial Library. Courtesy of the Columbus Area Visitors Center

케이시가 임시 사서로 근무하는 클레오 로저스 기념 도서관(Cleo Rogers Memorial Library-아이엠 페이(IM Pei) 설계, 1969년),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한 진이 비가 내리는 정원의 고즈넉한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밀러 하우스(Miller House- 에로 사리넨 설계, 1957년), 케이시가 이력서를 제출하기 위해 찾아간 사무실로 등장하는 더 리퍼블릭 신문사 사옥(The Republic Newspaper Building- SOM 설계, 1971년), 그리고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로버트 스튜어트 다리(The Robert Stewart Bridge- Jean Muller 설계, 1999년)까지. 마치 건축을 향한 무한한 경의와 감탄을 쏟아내듯이 코고나다 감독은 그렇게 관객에게 도시의 일부로, 풍경으로, 삶의 현장으로, 그리고 역사로 존재하는 건축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합니다. 진과 케이시가 머물렀던 모든 공간들마다 모더니즘 건축의 흔적이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결국 케이시는 건축이라는 꿈을 향해 콜럼버스를 떠나면서 눈물을 쏟아내고, 진은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이 도시에 남게 됩니다. 비록 떠난 자와 남겨진 자는 바뀌었지만 콜럼버스의 건물과 자연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케이시 대신 진이 콜럼버스의 건축물 사이를 거닐게 될 것이고, 그것들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공간 혹은 건축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로 작용할 수 있는지, 어떤 치유의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영화 <콜럼버스>는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그 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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