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사진 기록물을 보면 피사체는 주로 풍경, 그중 건축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오늘과 다르게 기술적 어려움으로 고정된 물체만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요. 덕분에 우리는 사진을 통해 오늘날 사라지고 없는 건축물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 그 사진들은 단순히 기록을 넘어서 당시의 역사, 문화, 예술을 아우르는 작품으로 평가 받기도 하죠.
요즘도 건축물만을 전문으로 찍는 사진작가들이 있습니다. 현대의 기술, 문화, 예술이 집약된 건축물을 피사체로 삼는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살펴봅니다.
현대 건축 사진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 LA의 ‘슈탈 주택(Stahl House)’을 찍은 줄리어스 술만의 사진입니다. 유리와 철골로 지은 현대적 건물이 절벽 끝에 매달린 듯 있고, 그 안에 멋진 드레스를 입은 두 여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인데요. 그는 이 사진을 통해 건축 전문 사진작가로 주목 받았습니다.
이외에 그의 찍은 건축물로는 산 위에 대담하게 돌출되어 있고 작은 폭포가 흐르는 ‘낙수장(Falling Water)’과 2019년 중요 건축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등이 있습니다. 그는 루돌프 쉰들러, 리처드 노이트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존 로트너, 프랭크 게리 등 유명한 건축가들과 함께 작업했고, 이들의 작품집엔 꼭 줄리어스 슐만의 사진이 들어가 있습니다.
슐만 사진에서는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1) 지역, 자연 속에서 어우러진 건물을 찍는다 2) 슈탈 주택에서 두 여인이 프레임이 함께 등장하는 것처럼 사람의 흔적을 녹여 담는다는 2가지 원칙을 두고 사진을 촬영합니다. 자연, 건물, 사람을 연결시킨 사진으로 건축물은 자연 속에 존재하고, 건축물 안에는 사람이 있다는 보편적이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줄리어스 슐만은 건축사진에 대한 열정을 교육으로도 풀어냈는데요. 2005년 줄리어스 슐만 협회를 우드버리 대학에 세웠습니다. 현재 협회는 장학금, 교육 프로그램, 초기 작가상을 통해 건축 사진 작가 발굴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70년간 찍은 건축 사진 덕분에 특별한 일도 있었는데요. 1947년 완공된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의 ‘카우프만 데저트 하우스 ’는 건축가 리처드 노이트라의 최고 걸작이었습니다만, 수십 년간 주인이 계속해서 바뀌며 허물고 덧대기를 반복해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던 중이었습니다. 한 부부가 매물로 나온 이 집을 구경하다 걸작이라고 불리던 건축물임을 알아보고 단번에 구매했는데요. 이때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것을 추천하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과 달리 부부는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기로 합니다. 그 과정에서 부부는 슐만에게 연락해 데저트하우스 사진을 구했습니다. 다각도로 촬영한 슐만의 사진 덕분에 건물 형태 외에도 공간이 추구하던 분위기까지 복원할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오늘날 그의 사진은 미국 건축 역사뿐만 아니라 삶, 지역, 환경을 회고할 중요한 아카이브가 되고 있습니다.
<비주얼 어쿠스틱>은 줄리어스 슐만과 그의 사진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영화인데요. 아쉽게도 국내 OTT로 서비스되고 있지 않지만, 공식 홈페이지로 영화 트레일러와 사진 작품 몇 점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스위스 발스 온천, 성베네딕트 예배당, 독일 하노버 엑스포 스위스관 등 섬세하고 깐깐한 건축으로 유명한 세계적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20년 넘게 작품 사진 촬영을 맡긴 사람이 있는데요. 바로 스위스 대표 건축 사진작가 헬렌 비네입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재건의 마스터 플래너였던 다니엘 리베스킨트,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 등 역시 헬렌 비네의 사진을 사랑해 촬영을 의뢰했습니다.
헬렌 비네는 필름으로 촬영하는 작업 방식으로 유명합니다. 하루 최대 20~30장만 촬영할 수 있고 보정이나 수정은 할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이 몸과 마음을 다해 건축물에 집중하며 리얼리티를 구현하기 위해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한다고 합니다. 그의 사진을 잘 보면 또 다른 특징 하나가 있는데요. 주로 흑백 사진으로 촬영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소리가 더욱 잘 들리듯 흑백 사진이 건축물이 주는 감정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색은 오히려 건축물이 주는 감정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본 것이지요.
헬렌 비네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외에도 병산서원, 종묘, 종로 주한 스위스대사관, 청도 혼신지 주택 등 국내 건축물도 촬영했는데요. 2만 평이 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60평 규모의 혼신지 주택을 각각 4일에 걸쳐 찍었다는 비하인드가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규모의 차이가 있음에도 똑같은 시간을 들인 이유를 묻자 ‘빛에 따라 사진 찍기 좋은 곳이 달라 작은 건물도 충분한 작업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했는데요. 그에게 빛은 공간을 드러내고 공간의 이미지를 만드는 중요 요소로,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건물의 아주 작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거나 재료의 질감을 섬세하게 드러내 마치 추상화 같은 사진을 찍습니다. 그래서 빛과 그림자의 언어로 쓴 시(詩)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2015년 줄리어스 슐만 협회 에서 우수상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 일부는 뉴욕 현대미술관과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 영구 소장품으로 보관되고 있다고 합니다.
헬렌 비네는 공식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홈페이지에서는 작품 몇 점을 공개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여는 그의 전시 소식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는 국내 건축 사진 작가의 첫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바로 김용관 작가의 <관계의 기록, 풍경으로의 건축>인데요. 김용관 작가는 1990년 건축잡지 <건축과 환경>을 거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 전문지 <공간>의 전속 사진작가로 활동했습니다. 1999년 우정아트센터 사진으로 국내 최초 미국건축가협회(AIA)의 건축 사진가상을 받으며 세계에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김용관 작가는 스스로 건축을 전하는 일차적인 매개체, 전달자라고 말합니다. 사진을 통해 3차원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겨 전달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3차원 공간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건축물의 외형 외에도 자연, 도시 등의 환경에 주목합니다. ‘관계야말로 건축이 가진 진정한 가치’라며 자연, 도심 속에 자리 잡은 오브제를 독립적으로 보기보다는 수많은 맥락을 연결해서 바라봅니다.
김용관 작가의 대표작으로는 ‘이타미 준의 제주 프로젝트’를 꼽을 수 있습니다. 각각 제주의 다른 매력을 뽐내면서도 나란히 산방산을 향해 놓인 수, 풍, 석 미술관의 특징을 제주의 자연 속에서 바라본 사진인데요. 특히 설원 속 석 미술관의 사진은 김용관 작가가 눈이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궂은 날씨를 마다하고 미술관 주변을 파고 들어가 촬영한 에피소드로 유명합니다.
2012년 12월, 김용관 작가는 1994년부터 2005년까지 필름 카메라로 찍었던 건축 사진 원판 슬라이드 1만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습니다. 건축가 이타미 준과 함께한 제주 미술관 프로젝트 작품을 비롯해 한국 현대건축의 주축인 승효상, 유걸, 민현식 등의 주요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첫 개인전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원판 사진전이 열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바입니다.